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사랑하느냐?”하고 세 번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삼중 고백으로 “예”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이어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삼중승인을 수여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묻고 답하는 방식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 당시 예수님이 흔히 사용하던 하나의 교차응답 질문 방식입니다. 이는 마태16,18과 루카22,34에서 보여주듯이 먼저 마태16,18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승인하실 때에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는 장면, 그리고 루카22,34에서 베드로의 삼중 부인을 예고하실 때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는 장면과 겹쳐집니다. 오늘 복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세 번물으셨는데 여기서 세 차례 사랑하느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본문은 아가페ἀγαπᾱς와 필레오φιλεῑς입니다. 세 차례 물음 중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물으실 때는 아가페로 물으셨고 세 번째는 필레오로 물으십니다. 아시다시피 아가페ἀγάπη는 인간과 신 사이의 사랑인 신적인 사랑,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박애심이나 자비심의 희생하는 사랑이고 / 필레오φιλέω는 좋아하다, 마음에 들다, 환영하다, 입맞추다, 즐기다 등을 의미하는 인간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삼중방식으로 묻는 것이 비록 교차응답으로 흔히 사용하던 예수님의 질문방식이라 하더라도 이 물음에는 분명히 어떤 의미와 뜻이 담겨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아가페로 사랑하냐고 물으셨고 세 번째는 필레오로 물으셨던 것은 베드로가 한결같이 필레오로만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물으셨을 때에 신적으로 희생하는 사랑의 아가페로 사랑하냐고 물었지만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필레오로 대답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다시 나를 신적으로 희생하는 사랑의 아가페로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필레오로 대답합니다. 그래서 세 번째 물으실 때에는 예수님이 바꾸십니다. 세 번째는 베드로의 대답처럼 필레오로 사랑하냐고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한결같이 필레오로 대답할 뿐입니다. 이렇듯 한결같은 베드로의 인간적인 사랑 필레오에 대한 예수님의 물음은 베드로의 응답에 맞춰서 신적인 사랑에서 인간적인 사랑으로 바뀌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삼중승인 또한 베드로에 성장에 맞춰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이렇듯 예수님의 삼중의 승인은 점진적으로 변화하는데 이것도 역시 베드로의 응답에 맞춰져 있습니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하시고 이어서 “내 ‘양’들을 돌보아라”고 하십니다. “어린양”에서 “양”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어린양ἀρνία아르니아(어원:아르노스ἀρνός의 이르니온ἀρνίον)이나 / 양προβάτιά프로바티아(어원:프로바톤προβάτον의 프로바티온προβάτιον)이나 모두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어린양을 의미합니다. 어린양 아르니아는 라틴어로 아뉴스agnus인데 희생제물로 바쳐지는 하느님의 어린양 “아뉴스 데이”의 양을 의미합니다. 희생양입니다. 그리고 프로바티아는 오비스ovis인데 이는 다 성장한 양을 의미합니다. 오비스 또한 목자가 없어서는 안 될 양이니 어린양이나 다름없는 양에 해당됩니다. 여기서 “돌보아라”라고 세 번 부탁하셨는데 그리스어본문에 이 돌보아라는 보스코, 포이마이네, 보스코입니다. 돌보아라의 보스코βόσκω(어원:보스크βόσκ의 보스케 βόσκε)는 유지하다, 지키다, 보호하다, 보존하다는 의미가 있고 / 돌보아라 포이마이네ποίμαινε(어원:포이맨ποιμήν의 포이마이노ποίμαινω)는 몰다, 돌보다, 기르다, 양육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하자면 첫 번째 돌보아라고 베드로에게 승인하셨을 때에는 신적인 사랑 즉 성부의 사랑으로 어린양을 양육하라는 의미이고, 두 번째 돌보아라고 승인하셨을 때에는 목자적인 사랑으로 양을 울타리 밖같으로 몰고 이끌어라는 의미이며, 세 번째 돌보아라고 승인하셨을 때에는 목자적인 사랑으로 다시 양들을 돌보되 처음에 신적인 사랑으로 돌보던 어린양처럼 양육하듯이 돌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러니 “나를 따라라” 즉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먼저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양육되었고 그리고 성장해서는 목자로서 세상 곳곳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했으며 마지막으로 늙어서는 당신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증거하게 되리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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