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가해 부활제7주간 금요일 성 필립보 네리 기념일 요한21,15-19 아가페 사랑, 필리오 사랑(20230526 대구협력)

jasunthoma 2023. 5. 25. 10:4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사랑하느냐?”하고 세 번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삼중 고백으로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이어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삼중승인을 수여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묻고 답하는 방식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 당시 예수님이 흔히 사용하던 하나의 교차응답 질문 방식입니다. 이는 마태16,18과 루카22,34에서 보여주듯이 먼저 마태16,18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승인하실 때에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는 장면, 그리고 루카22,34에서 베드로의 삼중 부인을 예고하실 때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는 장면과 겹쳐집니다. 오늘 복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세 번물으셨는데 여기서 세 차례 사랑하느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본문은 아가페γαπς와 필레오φιλες입니다. 세 차례 물음 중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물으실 때는 아가페로 물으셨고 세 번째는 필레오로 물으십니다. 아시다시피 아가페γάπη는 인간과 신 사이의 사랑인 신적인 사랑,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박애심이나 자비심의 희생하는 사랑이고 / 필레오φιλω는 좋아하다, 마음에 들다, 환영하다, 입맞추다, 즐기다 등을 의미하는 인간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삼중방식으로 묻는 것이 비록 교차응답으로 흔히 사용하던 예수님의 질문방식이라 하더라도 이 물음에는 분명히 어떤 의미와 뜻이 담겨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아가페로 사랑하냐고 물으셨고 세 번째는 필레오로 물으셨던 것은 베드로가 한결같이 필레오로만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물으셨을 때에 신적으로 희생하는 사랑의 아가페로 사랑하냐고 물었지만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필레오로 대답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다시 나를 신적으로 희생하는 사랑의 아가페로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필레오로 대답합니다. 그래서 세 번째 물으실 때에는 예수님이 바꾸십니다. 세 번째는 베드로의 대답처럼 필레오로 사랑하냐고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한결같이 필레오로 대답할 뿐입니다. 이렇듯 한결같은 베드로의 인간적인 사랑 필레오에 대한 예수님의 물음은 베드로의 응답에 맞춰서 신적인 사랑에서 인간적인 사랑으로 바뀌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삼중승인 또한 베드로에 성장에 맞춰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들을 돌보아라”, “들을 돌보아라이렇듯 예수님의 삼중의 승인은 점진적으로 변화하는데 이것도 역시 베드로의 응답에 맞춰져 있습니다. “어린양들을 돌보아라하시고 이어서 들을 돌보아라고 하십니다. “어린양에서 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어린양ρνία아르니아(어원:아르노스ρνός의 이르니온ρνίον)이나 / προβάτιά프로바티아(어원:프로바톤προβάτον의 프로바티온προβάτιον)이나 모두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어린양을 의미합니다. 어린양 아르니아는 라틴어로 아뉴스agnus인데 희생제물로 바쳐지는 하느님의 어린양 아뉴스 데이의 양을 의미합니다. 희생양입니다. 그리고 프로바티아는 오비스ovis인데 이는 다 성장한 양을 의미합니다. 오비스 또한 목자가 없어서는 안 될 양이니 어린양이나 다름없는 양에 해당됩니다. 여기서 돌보아라라고 세 번 부탁하셨는데 그리스어본문에 이 돌보아라는 보스코, 포이마이네, 보스코입니다. 돌보아라의 보스코βόσκω(어원:보스크βόσκ의 보스케 βόσκε)는 유지하다, 지키다, 보호하다, 보존하다는 의미가 있고 / 돌보아라 포이마이네ποίμαινε(어원:포이맨ποιμήν의 포이마이노ποίμαινω)는 몰다, 돌보다, 기르다, 양육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하자면 첫 번째 돌보아라고 베드로에게 승인하셨을 때에는 신적인 사랑 즉 성부의 사랑으로 어린양을 양육하라는 의미이고, 두 번째 돌보아라고 승인하셨을 때에는 목자적인 사랑으로 양을 울타리 밖같으로 몰고 이끌어라는 의미이며, 세 번째 돌보아라고 승인하셨을 때에는 목자적인 사랑으로 다시 양들을 돌보되 처음에 신적인 사랑으로 돌보던 어린양처럼 양육하듯이 돌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그러니 나를 따라라즉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먼저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양육되었고 그리고 성장해서는 목자로서 세상 곳곳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했으며 마지막으로 늙어서는 당신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증거하게 되리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