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16장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먼저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잠깐 예수님께서 걸어오신 길을 잠시 떠올려 봅시다. 예수님의 생애를 떠올려봅시다. 1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시고, 2나자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라시고, 3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4공생활 삼년동안 제자들과 기쁜 소식을 전하시고, 5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시어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시고, 6산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실 재림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물음에서 어떤 장면이 떠오릅니까??? Quo vadis, domine? 쿼-바디스 도미네? 그런데 정말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물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여기서 “간다”는 말이 두 번 나왔습니다. 첫 번째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와 두번째 "그런데 어디로 가십니까?"입니다. 첫번째는 나는 “간다ὑπάγω휘파고” 이고 두 번째는 어디로 “가십니까?ὑπάγεις휘파게이스”입니다. 나는 간다와 어디로 가십니까?의 휘파고와 휘파게이스는 아고ἅγω라는 동사에 휘프ὑπ라는 전치사가 붙었는데요 아고는 이끌다 안내하다 가져오다 데려오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이 단어 나는 간다ὑπάγω휘파고라는 말은 요한복음에 12차례 나옵니다. 요한7,33; 8,14.21.22; 13,33.36; 14,4.28; 16,5.10.16.17; 21,3 여기서 한 차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과 당신이 이루실 파스카를 설명해 주실 때에 나는 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마지막 21장에 가면 이제는 예수님이 아니라 베드로가 다른 여섯 제자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하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그 때에 이 휘파고를 한차례 쓰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물음으로서 “간다ὑάπάγεις”는 휘파게이스입니다. 그런데 휘파게이스라는 말이 요한복음에 네차례 나오는데 11,8; 13,36; 14,5; 그리고 오늘 복음16,5입니다.
먼저 요한11,8은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러 “다시 유다로 가자”하고 말씀하실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유다인들이 스승님게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리로 가시렵니까? 하고 묻는 내용입니다.
13,36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새계명을 주실 때인데 이때에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고 말씀하시자 시몬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묻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14,5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신다고 하면서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하고 말씀하시자 토마스가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가시는 데가 어디인지도(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 16,5에서 끝으로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묻는 사람이 없다"하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자들이 앞서 세차례에 걸쳐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는지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묻지 않았다는 듯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제자들이 주님! 라자로를 살리러 가시렵니까?하고 물었고 또 베드로와 토마스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각각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이 당신께 묻지 않았다는 듯이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러 가자고 하셨을 때에 제자들은 유다로 다시 가시렵니까? 하고 물었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라자로가 죽어 있는 장소로 가려고 하시는 구나 하고 알아들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말씀은 죽어있는 장소가 아니라 잠들어 있는 라자로를 깨우는 장소, 즉 부활의 장소로 가자고 하셨던 것을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제자들이 서로 다르게 생각했던 이유는 먼저 제자들과 예수님의 어디로 가시는지에 관한 물음의 기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절망을 지니고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를 물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희망을 가지고 묻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되물었던 것입니다. 그 희망은 미래에 있을 어느날을 희망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말론이 도래할 때에 그들에게 보호자를 보내주심으로 그들의 절망을 희망으로, 그들의 죽음을 부활로 대신 하기 위한 기다림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떠나심을 두려워하며 묻지 못했던 것은 죄와 죽음이었습니다. 죄를 짓지 않았는데 죄인이 되고 아직 한창의 나이에 죽음에 내 몰리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과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선한일을 많이 하였는데 세상의 통치자들은 그들을 죄인으로 심판하고 온갖 모함과 협박을 가해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신께서는 아버지께 돌아 가셔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진리의 영이신 파라클리토 성령이 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오시기 위하여 "이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세상의 우두머리(아르코)는 세상의 악한 권력자들이나 통치자들을 지칭하는데 실제로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아르코를 사용한 구절을 찾아보면 악한 권력자나 통치자를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르코는 먼저 마태/루카에서 야이로 회당장에게 한번씩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니코데모에게 한차례 사용(요한3,1)한 것을 제외하면 모두 예수님 당신 자신과 관련지어서(요한12,31; 14,30; 16,11)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심판을 받으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우두머리는 세상의 권력자와 통치자와 더불어 예수님 당신 자신을 지칭하듯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뉘앙스는 묵시록 1,5에서는 더 분명해 집니다. 우두머리(아르코)에 관하여 묵시록에서는 이렇게 당신 자신을 지칭합니다.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 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일컬어서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우두머리)라고 했습니다. 먼저는 세상 우두머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두머리의 지배자가 있는 것입니다. 이 우두머리는 죄의 우두머리인데 창세기 3,3-4 나오는 뱀을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류가 최초로 죄를 범하는 장면입니다. 어떤 장면입니까??? 하와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얼마나 교묘하고 간교한 유혹입니까? 너희는 죽지 않는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이렇게 유혹자인 악마는 진리의 말씀을 바탕으로 사람을 유혹하고 속입니다. 악마는 항상 사람, 문화, 종교의 유익함과 선한 의도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세상에서 폭력과 죽음의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이기시고 외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들어 올려지겠다는 의미로 오늘 우리에게 "나는 간다"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모님 또한 당신 아드님이 걸으셨던 죄의 길을 물리치시고 아버지께 들어 올려지셨습니다.
오늘 하루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진리와 생명으로 우리의 이 길을 이끌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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