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다해 주님공현대축일 마태2,1-12 공현의 결심(스승)

jasunthoma 2016. 1. 7. 04:14

주님 공현대축일은 성탄후 12일째 되는 날인 1월 6일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월 2일부터 8일 사이 주일에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방박사들이 동쪽에서 서쪽하늘에 뜬 샛별을 보고 임금으로 나실 분을 찾는데 12일이 걸렸다는 얘기입니다.

그 길은 아마도 제가 생각하기에 이스라엘의 성조 아브라함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하였을 때

그리고 그 말씀대로 길을 떠났을 때에 걸었던 그 길과도 같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여정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루카2,9-11)

 

그런데 오늘 복음은 동방박사들의 여행 일정을 기록한 것 같지만 실은 별이 멈춘 곳에 이르러 그 곳에 계신 아기와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경배하는 장면에서 모두의 시선이 고정되고 있음을 알 수있습니다.

루카복음에의하면 이 멈춰버린 시선이 고정되는 순간 마리아는 이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던 것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마음속 깊이 새기고 되새기고 오래 간직한다는 것은 결심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와 같은 장면을 루카복음서 1장과 2장에서는 걸쳐서 모두 세차례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잉태되기전 천사 가브리엘이 찾아왔을 때, 그리고 오늘 동방박사들이 찾아온 것 처럼 목동들이 찾아왔을 때,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소년시절에 예루살렘에서 율법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는 장면을 보았을때에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모든 일을 곰곰이 생각하고, 되새기고,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입회해서는 단 한번도 연말에 산 정상에 올라 일출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저는 수도원에 들어가면 그런일이 가능할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내온 결과는 불가능하다는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것만 같은 예감이 듭니다.

수도생활이 매일매일 한없이 한가하다가도 일출이 뜰 무렵만 되면 절대적으로 무조건 바빠지기 때문입니다.

그점을 입회하기 전에는 몰랐던 것입니다. 한가함에 속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새해 첫날 미사시간이 아침 9시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벽4시에 칼바위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겨울철이라 해가 되게 늦게 뜨는 것입니다.

7시면 뜰줄 알았는데 8시가 다되가는데도 뜨지 않는 것입니다.

미사시간은 다가오고해서 그냥 내려왔습니다.

그때 내려오다가 일출을 봤습니다.

하지만 입회하기 전까지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집에 붙어 있었던 적이 없을 정도로 산 꼭대기에서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제대하고 입회할때까지 6년간을 새해를 산꼭대기에서 맞이했습니다.

그 중에 특히 잊을 수 없는 일출을 떠올려봅니다.

히말라야에 비길수는 없지만 적설량은 히말라야에 못지않을 것 같은 덕유산 향적봉에 일출보러 올라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출을 너무 심하게 봐서 1박2일동안 어둠속에 있다가 밤에 내려왔던 일이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영화:히말라야 장면과 겹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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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혹시 작년 2015년 한해는 행복한 한해였습니까?

행복한 일이 있었다면 무엇이 행복한 것이 었던지를 좀 생각해보면 좋을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결심하고 깨어있는 것보다 더 행복한 것은 없는것 같습니다.

무엇을 결심한다는 것은 우리를 깨어있게 하는것 같습니다.

창립자께서는 하셨던대로 우리는 한해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하여 해를 가르는 밤을 이어서 성체앞에서 깨어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송년미사를 드리고 이어서 우리 모두는 성체앞에서 밝아오는 2016년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서 머물렀습니다.

그때 어떤 일출보다 더 밝은 빛이 이미 우리 마음속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결심들을 했고 또한 그 결심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깨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작년 한 해를 돌아보면서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만백성들 앞에 드러나기 위해서 성모님께서도 당신이 결심했던대로 때가 차기를 묵묵히 기다렸고 곰곰이 생각했고, 되새기고, 마음속 깊이 간직하여 결심이 이루어져서 결실로 드러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자렛 시골 여인의 품에 안긴 아기를 뵈옵고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깨달음과 통찰을 얻을 수 있이었던 것은 그들이 자신의 계획에 따라 목표를 세우고 결심을 하고 깨어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자신을 봉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자신의 계획이고 또 어떤 것이 하느님의 계획인가??? 하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탄팔일축제를 지내는 동안 전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어떻게 사람이 되셨는지 하느님의 계획을 불 수 있었습니다.

특히 칠일째 되던날 복음에서는 "한 처음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가운데 사셨다"고 일러주었습니다.

한처음이라는 말씀은 성경에 가장 먼저 나오는 첫 단어 아르케라는 희랍어를 번연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 처음에는 태초에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맨처음 또는 바야흐로 또는 비로소 좀더 친숙하게는 시방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표현들입니다.

즉 시작하는 분, 또는 주도하시는 분이시라는 말과도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계획은 성경에 가장 먼저 나오는 첫번째 단어를 보고 알 수 있듯이 하늘나라를 향한 구원을 시작하시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계획은 인간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말 속에 들어있다고 생각할 수있습니다.

맘~마

무슨 말입니까???

살려다라는 말인것 같습니다.

아기가 어머니에게 구원을 시작해달라고 요청인것처럼

인간의 계획은 나를 살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계획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원칙이고 우리 인간의 계획은 나 자신에게 해당되는 준칙이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칸트가 정언명법이라고 하는 보편적인 법칙을 제안하기 위해 사용한 원칙과도 같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원칙이 하느님의 계획이 될 수 있고 또한 자신의 계획이 아니라 공동체의 계획으로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계획으로 볼 수 있는 생활계획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들 중에서 내가 하는 일만큼은 하느님의 계획인줄 알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모두가 다 아는데 자신만 모르고 자신은 하느님의 일을 하노라고 믿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들면 미사빼먹고 일출보러 가는 일이 하느님의 계획인가??? 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일을 모두에게 적용했을 때에 모두가 그렇게 동의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인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결심도하지 않은 일들을 나도 모르게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하는 생각에 마음아파하지말고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공동체의 결심에 또는 하느님의 계획에 내가 협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즉 동방박사들과 마리아가 보여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오늘 나도 살기로 이미 결심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마음의 보물상자를 열고 우리의 보물들을 예물로 내어 드릴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