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나해 연중제14주간 금요일 마태10,16-23 순박한 슬기(제주협력)

jasunthoma 2015. 7. 11. 06:3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시고 난 후 사도들을 파견하시기 전에 주의사항과 숙지사항 등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제자들에게 일종의 파견설교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면은 우리가 본당 활동을 하다보면 자주 접하게 되는 흔한 장면일 수 있습니다.

본당 여름 신앙학교 캠프를 가기 전에 본당 주임신부님께서 참가자들에게 훈화하시고 강복하시는 장면도 이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성당 마당에 모두 모이면 신부님께서 참가자들에게 안전사고 예방 차원에서 주의사항과 숙지 사항 등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신앙학교 캠프 기간동안 하느님의 은총과 성모님의 보호가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저런 덕담을 해주십니다.

끝으로 어디를 가든지 어떤 어려움이 있든지 천주교 신자로서의 본분을 잊지 말라고 이르신 후 강복을 해 주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이처럼 본당 신부님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자들의 안전이 최우선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들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파견설교(산상,파견,비유,공동체,불행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말씀을 하시기 전에"이스라엘의 길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10,6) 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그 길잃은 양들이 박해를 받고있기 때문입니다.

박해를 받고있는 곳에 보내시면서 너희도 박해를 각오하여라 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안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위험한줄 알면서도 그곳으로 보내는 무책임한 스승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기에는 예수님은 당신 생명을 바치시기까지 우리를 위하여 헌신하신 분이신데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처럼 위험을 감수하라고 하시는 것에 대하여 이해할 수없고 받아들이기도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권고하신 말씀을 잘 들여다 보면 어찌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험지역으로 보내셨는지 또한 그럴 수 있었는지에 관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리떼가 우글거리는 위험한 곳으로 가더라도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기만 하면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위험한 곳일 수록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자체가 불안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뱀은 원죄를 지은 인간을 상징하고 비둘기는 성령으로 충만한 인간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몸은 인간이 머리를 굴려 죄를 지을 때처럼 아주 약삭빠르게 처신하여 슬기롭게 대처하고

우리의 영혼은 항상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도록 열어놓아 하느님 말씀에 순박하게 응답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뱀처럼 슬기롭게와 비둘기처럼 순박하게를 따로 떼어놓거나 분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슬기로우면서도 순박하게가 함께 연결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따로 떼어놓는 일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이 즐겨쓰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뱀처럼 슬기로우면서도 또한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대처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동태복수법이라고 해서 그 바탕은 율법의 가르침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상법과 배상법에 적용시키지 않으시고 화해와 용서에 적용시키셨습니다.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가 율법에서 가르치는 동태복수법이라고 한다면

네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동태복수법입니다.

오른뺨을 때리거던 왼뺨마저 돌려대어라도 마찬가지구요!!

또 뭐가 있습니까? 겉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속옷마저 내주어라와 천걸음을 가자고 하거든 이천걸음을 가주어라는 것도 율법의 모순을 허물어버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본래의 동태복수법에서는 율법의 단순하고 순박하고 순수한 면만이 드러나있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넘어 오게되면 그 순박한 면에 더해 슬기로움까지 지니게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파견 권고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한 성경속의 인물이 있었다면 누가 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누구일까요??? 과연 누가 있었을까요??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스라엘의 선조 야곱이 아닐까??? 하고 생각햅보니다.

야곱은 형 에사오가 무서워 집을 도망쳐 나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형에게 뱀처럼 슬기롭게 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형 에사오는 난폭하여 사냥을 잘했고 야곱은 어린양처럼 집안에만 머물며 가정을 도와 죽을 잘 끓였던 모양입니다.

여기서 장작불을 지피고 죽을 끓이는 야곱의 모습은 순박한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던 야곱은 죽 한그릇을 가지고 형 에사오의 장자권을 가로채고 그것도 모자라 아버지 이사악으로부터 큰아들에게 돌아갈 축복까지 받아냈습니다.

이처럼 종합해보면 야곱은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 에사오 입장에서 본다면 그런 동생 야곱은 물어뜯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처지에 있었고, 야곱에게 있어서 그러한 형은 사나운 이리떼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실재로 야곱이 에사오를 만나고 싶다고 하자 에사오는 장정 4백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겠다고 으름장을 톻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가 되자 야곱은 형 에사오를 만나러 갑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천사가 일러주는대로 그저 단순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결심을 하고나서 형을 만날 때가 되자 형을 직접 만나기가 두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중재자를 세웠습니다.

야곱은 양과 염소/ 나귀와 황소/ 그리고 낙타를 각각 암수로 구분하여 떼를 지어 형 에사우에게 먼저 보냈는데 모두 열 무리나 되었습니다.

여기서 야곱이 슬기로운 것은 장정 4백명을 거느리고 기다리는 형에게 곧바로 다가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야곱의 처신을 보면 먼저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이어서 슬기롭게 처신한다는 것입니다.

순박함이 갈라진 형제를 이어주는 다리의 교각과 같은 역할을 한다면

슬기로움은 교각과 교각사이를 연결하는 교량의 상판과 같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교각 없이 상판을 놓을 수 없고 상판없이 다리를 건널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박해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하늘나라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지 못하기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땅에 살면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어서 그렇기도 합니다.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늘만 쳐다고고 있느냐?"

다시 갈릴레아로 가거라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시며 다시 땅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는 두가지 세포가 있는데 네추럴 세포와 원시 세포라고 합니다.

빠르게 증식하는 원시세포를 일컬어 암세포라고 하고 그러한 원시세포를 잡아먹는 세포를 내추럴 세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오염된 몸/ 즉 산소가 희박한 체내에서는 원시세포는 더욱 빨리 증식을 잘하는 반면 내추럴 세포는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산소가 부족하게 되면 좋은 세포가 죽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추럴세포가 활동을 못하게되면 결국 원시세포에 의해서 암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체내에 산소가 희박하게 되는 원인이 뭘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결국 암이 발생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 체내에 산소가 희박하게 되어 원시세포가 빠르게 증식하도록 하는 요인은 평상시 우리의 감정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원한을 지니고있거나, 격분하고 있거나, 분노하고 있거나, 폭언을 일삼거나, 증상이나 악한 마음을 지니고 있을 때에 우리는 숨쉬는데 장애가 생기게 됩니다.

즉 이러한 감정들을 지니게 되면 들이쉬는 숨은 적게하고 내 뱉는 숨은 자주 쉬게 되는 것입니다.

숨을 적게 들이 마시고 자주 내뱉게 되면 당연히 체내에 산소가 부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을 참을때에 발생되는 것이 스트레스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록 암 발생율이 놓게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복하게 되려면 우선 우리 몸이 먼저 건강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늘나라를 보려면 먼저 땅이 가진 장점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땅의 가치를 믿어야 합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믿지 못하면서 하늘나라가 있다고 믿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래서 한쪽만을 신뢰한다는 것은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기도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홀로 드리는 기도보다 둘이 또는 여럿이 모여서 기도를 드리는 기도를 더 좋아하신다는 것을 우린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함께 기도하면 기도가 더 잘 되는 이유가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보물이 뭍혀있는 밭을 통째로 산다고 말했습니다.

보물만을 캐는 것이 아니라 그 보물이 뭍혀있는 밭을 통째로 사들이는 것입니다.

보물의 가치가 나머지 여분의 땅조차도 사들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충만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그리고 이번달을 지내는 동안 예수님 안에서 순박하고 슬기로롭게 사랑도 함께하고 용서도 용서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