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한다 하며
당신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십자가 수난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당신을 따르는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져라는 말씀의 의미는 알듯알듯 하면서도 이해하기 쉽지않은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에 관하여 생각해 보는 것이 오늘날 신앙인들의 숙제가 아닐까?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한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제 뒤에 십자고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저 십자 고상을 보면 어떻습니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저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저는 이렇게 버젓이 서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못박히지 않은 것도 부끄러운 일이 됩니다.
여기서 부끄럽게 여긴다는 의미는 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일상적인 느낌으로서의 부끄러움이고
다음은 성서적인 의미로서의 부끄러움입니다.
우리가 흔히 느끼는 일상적인 감정인 아이 부끄러워라 -> 쑥스러워라 -> 여러워라 까지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다라는 의미는 평범한 일상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처럼 극적인 상황에서 발생되는 부끄러움 또는 수치스러움입니다.
시편127, 5 전동이 그득한 자는 실로 복되도다. 성문 앞에서 원수와 말다툼 할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 에서 말하는 그런 죽음이 전재된 부끄러움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일상생활에서 십자가 영성을 살아간다는 것은 실재로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터에서 원수와 말다툼 하는 위협을 늘 느끼며 살아가는 순교영성을 의미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순교를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우리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교는 죽는 순간까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죽음을 임종을 맞이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먼저는 일상생활을 통해서 겪게되는 부끄러움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생이 다하는 날 겪게되는 부끄러움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 자존감에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부끄러움을 버리고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끄러움을 버린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과 전혀 다름니다. -> 그사람이 바로 전대요(예화)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어두지 않고 드러낸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상태를 어린이라면
부끄러움을 버린 사람은 어린이처럼 사는 사람이 됩니다.
즉 어린이는 부끄러움을 모르지만 어린이처럼 사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압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 죽음을 향해가는 존재/ 지금 살아있지만 인류의 긴 역사 안에서 본다면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긴 역사안에서 본다면 죽은 존재나 마찬가지/
그러므로 인간=죽음 이라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그리고 죽음=부끄러움(성경에서 말하는 부끄러움은 죽음을 전제한 부끄러움)
결국 부끄러움=인간 의 공식이 성립됩니다.
즉 인간은 곧 부끄러움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진사람은 부끄러움을 잘 알고 있지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부끄러움을 버렸기때문에 더이상 부끄러움이 자신을 부끄럽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끄러움을 자랑으로 여기게 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를 통해서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 . . . .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하고 권고합니다.
이는 로마서에 앞서 이미 코린토서를 집필할 당시 죽을 위험에서 자신을 구해주신 분은 주님이시라며 자신의 부끄러움을 자랑으로 여기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코린토2서에서 바오로사도는 자신이 겪은 고난을 이렇게 자랑하며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슬기로운 사람이어서 어리석은 자들을 잘도 참아 줍니다. 사실 누가 여러분을 종으로 부려도, 누가 등쳐 먹어도, 누가 휘어잡아도, 누가 거드름을 피워도, 누가 얼굴을 때려도, 여러분은 참아 줍니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너무 약해서 이런 짓까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가 감히 자랑한다면, 어리석음에 빠진 자로서 나도 자랑해 보렵니다... ...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 내가 자랑해야한다면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을 자랑하렵니다"(2코린11,19-30)
이러한 사도바오로의 심정을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서는 이렇게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다?(지혜3,1-2)
이번 주일은 성김대건안드레아사제와 성정하상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선조들은 피로써 하늘나라를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때문에 갖가지 수모를 겪고 결국에는 피를 흘려 순교의 영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신앙인들의 처지는 옛 선조들의 적색 순교를 답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래서 백색순교, 혹은 녹색순교를 통해서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순교적 삶을 살아가야 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셨던 능욕과 부끄러움을 그제자들이 이어받았고 우리 신앙 선조들이 물려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따름으로서 오늘날 이 세상에서 어떤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세가지 부끄러움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먼저 정결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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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청빈하게 살아갑니다.
~~~
또한 순명하면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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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지신 십자가는 분명히 인류 구원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하여 지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따로 간곡히 드린 기도가 많이 있겠지만,
매일 매일 하루도 빠짐 없이 드린 기도 중에 간혹 당신 자신을 위하여 드린 기도가 무엇이었을까하고 생각해보면
그중에 하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이 인간이라는 십자가를 끝까지 버리지 않도록 바라는 것이 아니었을까합니다.
그만큼 하느님이시면서 인간의 자녀로 살아가며 당신제자들에게 본을 모범을 보여준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을 감수해야만 하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녀야할 십자가는 분명 이웃사랑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진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우리또한 예수님처럼 따로 간곡히 드리는 기도가 많이 있습니다.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드리는 기도 중에 간혹 나 자신을 위하여 드린 기도가 무엇이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그중 하나는 인간인 나 자신이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처럼 내 십자가를 끝까지 버리지 않도록 바라고 희망하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인간이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한다는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기도많이 하세요? 기도를 하면 어떻습니까?
눈물이 날 수도 있고 기쁨이 충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잘 웃는 편입니까? 혹 잘 우는 편입니까?
혹시 어느날 문득 왠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때가 있습니까?
아니면 어느날 문득 왠지 나도 모르게 기쁨이 충만하여 웃음이 날때가 있습니까?
우리가 어느날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때/ 혹은 한없는 기쁨이 밀려올 때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징표가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인간으로서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십자가를 통해서 참 행복에 이를 수있는 삶을 살 수 있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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