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사

‘덴징거Denzinger'의 기원과 목적

jasunthoma 2009. 2. 28. 20:02

‘덴징거Denzinger'의 기원과 목적

 

   덴징거는 1819년 10월 10일 벨기에 리에즈(Liège)에서 태어나, 1844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고, 뷔르츠부르크(Würzburg) 대학에서  1848년부터는 교의 신학을 가르쳤다. 당시 유럽 사회는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 무신론적 유물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의 영향으로 세속화의 길로 가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교회 내부에는 전통주의자들이 있었던 반면, 교회 외부에는 신앙 없이 이성만으로도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성론자들이 있었다. 당시 교회는 전통주의도 극복해야 했지만 현대 철학과 과학에 타협하는 이성론자들과도 맞서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덴징거는 초자연적 신앙을 변호하는 가톨릭교회의 독특한 특징을 담은 가르침들을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었다.1)

   “저는 현재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로마 교황과 보편 공의회에서 나온 신경과 결정 편람」을 인쇄하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긍정적인 결정들, 주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거나 소홀히 하고 있는 단죄된 명제들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함입니다.”2)

   덴징거는 처음부터 교의적이며 호교론적인 원칙문제를 다루는 취지로 이단에 투쟁하기 위한 긍정적 기여로서 편람(Enchiridion)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19세기 가톨릭 신학을 긴장시켰고, 독일에서 격렬한 신학적 전선 형성을 불러일으킨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문제 토론에 단호하게 개입하였다. 전에는 게르만의 옹호자였으나 이제는 “로마와 예수회가 그에게 부여한 것을 자신의 조국을 위하여 전해주는” 것에 있다고 여기고 독일에서 생긴 교의학적인 혼란에 직접 개입할 권한을 해당 주교에게 위임받았다. 그는 독일에서 드러나 있거나 잠재되어 자라나는 모든 신학적 오류들을 타도할 마음에 불타 있었다. 그는 불타는 열정으로 같은 대학에 있던 온건한 이성론자인 안톤 귄터를 단죄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3) 얼마 후 이탈리아 예수회의 종교․문화 잡지인 ‘치빌타 카톨리카’ 는 1857년 봄(172호)에 덴징거의 진심어린 의도를 온전히 경시하면서 그 작품에 대한 가차 없는 혹평을 기제 했다. 덴징거는 자신의 개인적인 동지들로부터 아주 악의에 찬 방법으로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느꼈으며, 대학 교수로서의 자신의 평판뿐만 아니라, 자신의 학부의 명성이 위태로워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극복할 수 없는 자기 확신을 잃었으며, 38세가 되던 1860년에 전신마비가 되는 병에 걸렸다.4)

   이렇게 ‘편람’은 덴징거가 자신의 학생들에게 학업을 위한 참고서를 제공해 주는 교육적인 의도를 가지고 커다란 반향을 불러온 작품이었으며, 학업을 위해 생겨난 것5)이었으나 지나치게 이단적 금서들을 가려내는데 치중한 듯한 여운을 남겼다.


1) 강영옥, 한국가톨릭대사전 제3권, 1731.


2) 재인용: Manfred Weitlauff, Zur Entstehung des Denzinger. - 황치헌, 이성과 신앙 35호, 「‘덴징거Denzinger'의 기원에 대하여」, 수원카톨릭대학교출판부, 2007, 192.


3) 황치헌, 이성과신앙 35호, 같은 글, 211-216.


4) 황치헌, 이성과신앙 35호, 같은 글, 245-246.


5) 황치헌, 「‘덴징거Denzinger’의 올바른 사용에 대하여」, 이성과 신앙 제35호, 수원카톨릭대학교출판부, 2008, 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