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사

적응주의 논쟁과 중국의 선교

jasunthoma 2009. 2. 28. 20:00

적응주의 논쟁과 중국의 선교

 

 

   예수회의 마태오릿치는 그의 신앙설교에서 완전히 의식적으로 현지의 신(神) 개념을 연결시켰었다. 중국은 수준 높고 종교적인 민족이지만 지금까지 하느님을 숭배한 적이 없고 따라서 신앙 없는 생활을 한 것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을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제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오히려 릿치는 그들이 언제나 경건하였음을 그들에게 확인시켰고 또한 모든 신인식(神認識)은 그리스도교인의 신앙에서만 최고로 완성됨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지금까지 그들이 숭배하였을지 모를 ‘상제(上帝)’는 바로 그리스도며 그리스도교의 계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더욱 잘 이해시킨다고 하였다. 이교적 우상숭배의 혐의가 없는 한 그는 공자숭배와 조상제사도 시민적 전통의 행위로 존속시켰다. 중국문화의 모든 자연적인 가치는 마땅히 그리스도교에서 그 정당성이 유지되어야 했고 이렇게 그리스도교가 중국인들에게 신뢰받는 것이 되어야 했다. 이렇게 중국선교에 적응주의를 채용하고 비상한 성공을 거둔 릿치는 당시 교회의 눈으로 볼 때 너무 지나쳤던 것일까?2)

   1630년대부터 중국에서 활동하던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의 선교사들은 적응주의를 지나친 것으로 주장하고, 릿치와 예수회회원들을 로마에 고소하였다. 이 고소를 시작으로 옹호와 단죄로 양분되어 교황이 바뀔 때 마다 이를 번복하였다. 인노첸시오 10세는 1645년 적응주의를 금지하였다. 알렉산델 7세는 1656년 이 금지를 완화하였다. 이때 중국 황제 강희제(康熙帝)도 관용령을 내려 그리스도교를 옹호하였으나 클레멘스 11세는 1704년 그것을 다시 금지하였다. 이에 강희제(康熙帝)도 예수회원들의 적응주의적인 것과 다른 것에 한해서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설교를 금지하였다. 그 후 인노첸시오 13세가 1723년 다시 완화를 인정한 다음, 1742년 베네딕도 14세는 모든 적응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금지령을 반포하였다. 이는 동부 아시아 포교지의 사멸(死滅)을 의미하였다. 곧 중국에서 그리스도교인에 대한 장기간의 박해가 시작되었고 100여년에 걸친 교회의 선교전략은 물거품으로 돌아갔으며, 더 이상 포교의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3)


1) 최기복, 「명말청초 유가의 반서교 논변」, 이성과 신앙(창간호), 수원가톨릭대학교, 1989, 37.


2) 아우구스트 프란쯘, 최석우,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0, 371.


3) 황치헌, 세계교회사강의록II, 수원가톨릭대학교, 2008, 98-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