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피정 주제는 성령께 영광입니다.
첫해에는 성부께, 작년에는 성자께, 그리고 올해 성령께 영광으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그 몇해 전부터서 여러가지 핵심적인 주제로 한해, 한해 피정을 무사히 잘 할수 있도록 우리 바오로 가족을 이끌어주시고 은총과 축복을 베풀어 주신 아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한평생 바오로인으로 살아오시면서 창립자로부터 직접 듣고 보고 함께 살았던 카리스적 은총을 남김없이 우리에게 헌신적으로 쏟아부처주신 베르나르다 수녀님께 감사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저와 수녀님과의 만남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한해 한해 동반해주신 피정이 하도 만만치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만나온 것으로 기억에 새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피정이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창립자가 피정은 영성수련이라고 하시며 이 기간동안에 몸과 마음의 쇄신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기를 바라신점을 아마도 수녀님께서는 충실하게 따르셨기에 "이제 너희는 가서 좀 쉬어라"는 말씀에 중점을 두지않고 '아직도 쉬고 있느냐 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 가자' 라는 말씀에 더 비중을 두고 쉬는 피정이 아닌 영적쇄신 영성훈련 프로그램으로 준비해 주셨기에 어쩌면 제 뇌리에 그토록 새겨지게 되지 않았을까합니다.
하지만 올해 피정만큼은 성령의 특혜를 누릴 수 있도록 시간적 배려를 약간 해주신것 같아 한결 자유로운 마음으로 피정에 임할 수 있었던것 같습니다.
특히 피정강의 첫째날과 둘째날에 있었던 강의 내용이 계속해서 저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성삼위가 공통적으로 가진 본성은 사랑이고
성삼위 친교의 역동성은 사랑이다
곧 세 위격을 묶어주는 것이 사랑이다
삼위 모두는 사랑이고 각 위격이 사랑이다
하지만 성령은 성삼위 사랑의 사랑이다"
"해와 빛과 온기는 삼위로 구성된 하나이시고
해가 빛이 없으면 해라 아니며 (=아버지가 아들이 없으며 아버지가 아니듯)
빛 또한 빛자체만으로는 해라할 수 없네
온기 또한 해와 빛의 관계와 같네
성령은 온기와 같아 성령이 없으면 차갑고
무거워서 가까이 하기 어렵네" (=친교할수 없네)
그리고 둘째날 사도행전의 교회의 첫번째 성령강림에 관하여 하신 말씀이 저를 계속 이끌어 주었습니다.
즉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해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레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참된 친교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친교란 상대방이 듣고싶은말, 들을 수 있는 말,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 원하는 말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사도들의 첫번째 성령강림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온기를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령강임은 바로 지금 바로 여기서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두번째 성령강림은 일어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정동안 줄곧 두번째 성령강림을 체험하기 위해서 성령의 온기 안에 머무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몰입해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는 늘 온기가 머물러 있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하여 증언하신느 분이 따로 계신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계속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즉 교회의 일들을 하도록 불리움 받은 협조자 성령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분이 맡기신 일인가? 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그것이 무엇을 열심히 하는 것일수도 있고,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협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협조하고 돕는데서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온기를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피정동안 큰 열정으로 온기를 전해주신 수녀님 두 분이 계십니다.
피정 기간동안 20강의를 열정적으로 해주신 수녀님과 까다로운 통역을 비롯하여 피정 협조자수녀님들이십니다.
그리고 또 한 분은 피정동안 30끼의 식사를 준비해주신 수녀님과 함께 협조해주신 공동체 수녀님들이십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네)
강의 말씀 중에 감동적으로 온기를 느낀 경우도 있지만 저는 이번 피정 내내 식사 중에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침묵중에 식사를 하는데 식사 중에 눈물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물의 의미를 생각해보니 강의실에서 말씀으로만 성령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부엌에서도 침묵중에 성령이 현존하고 계심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엌에도 성령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로 일용할 양식을 씻어내시듯 우리의 죄를 씻어내시는 물의 성령이 계시고
칼로 각종 야채를 자르고 끊어내시듯 우리의 죄를 끊어내시는 칼의 성령이 계시고
불로 달구고 사르듯 우리의 죄를 태우시는 불의 셩령이 계시어
주님의 만찬식탁으로 새로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성령은 온기이시고 온기는 친교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온기를 느낄 수 있으려면 차이가 나야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둘다 온기가 같으면 둘다 온기를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서로 손이 차갑거나 서로 손이 따뜻하다면 온기를 느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친교라함은 누군가는 주고 또한 누군가는 받아들이는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둘다 똑같이 주려고하거나 둘다 똑같이 받으려고 하면 친교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친교라함은 다양성일 수는 있지만 동등성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번 피정을 통해서 얻게된 바오로인의 영적여정으로 주어진 영감을 주는 말씀은
"자 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 가자"입니다.
긜고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모습을 가추실 때까지 병화의 은총은
겸손함입니다.
구체적으로는 하느님께 먼저 우선권을 두되 내가 세상을 바라보듯이 상대방의 눈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도록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또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육화를 방해하는 장애물이나 자주 자신을 주장하고 자기 뜻대로 하고자 하는 방식을 찾는다면
경쟁심입니다.
경쟁심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지는 것이 이긴다. 예수님도 세상에 지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배움/ 내려놓음/ 내어버림을 지금 실천할 때에 비로소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한머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해 사순제5주간 화요일 요한8,21-30 비우는 친교(성바) (0) | 2016.03.15 |
---|---|
다해 사순제5주간 월요일 요한8,12-20 완전한 증언(성바) (0) | 2016.03.15 |
다해 사순제3주간 수요일 마태5,17-19 (0) | 2016.03.15 |
다해 사순제3주간 월요일 루카4,24ㄴ-30 귀향(스승) (0) | 2016.02.29 |
다해 사순제2주일 루카9,28ㄴ-36 거룩한 변모(성마리아재속회-까떼) (0) | 2016.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