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간에 말랑말랑한 찰흙으로 새를 한마리 빚어서 출품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남에 따라 작품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날개에 금이가고 목이 꺽어져 떨어져버렸습니다.
찰흙에 물기가 빠져나가고 딱딱하게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하고 생각해봅니다.
우리 인간도 이렇듯 찰흙과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찰흙에서 물기가 빠져나가듯이 우리의 육신에서도 언젠가는 생명이 빠져나갈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흔히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말이 불변의 진리처럼 들리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은 언젠가는 죽는다고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생명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은 우리곁에 우리와 함께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하느님이 살아계시는 한 생명은 멈추지 않으며 사라지지 않으며 생명은 보장되는 것입니다.
다만 찰흙이 마르면 각 지체들이 떨어져 나가듯이
육신이 때가되면 생명이 빠져나가 새처럼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정정해서 말하면 육신이 생명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지 생명이 육신에서 빠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애깁니다.
육은 죽을지라도 생명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다 한다는 말은 부활신앙 안에서 만큼은 잘못 이해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천년 전 이때 즈음해서도 생명존중의 문화와 죽음의 문화가 한창 대립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유다인들에게서 그리스도인들이 갈라져 나온 가장 큰 이유도 여기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유다인들에게서 갈라져 나온 가장 큰 원인은 생명 존중 때문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유다인들에게서 생명존중이란 하느님 앞에서 부차적인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생명이 판단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으로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게 가능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마땅한 일이며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생명을 경시하고 율법에 얽매여서 양심이 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생명은 최우선 존중의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따르던 초대 원제자들에게서만큼은 생명 존중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즉 생명 존중이 하느님 사랑을 앞서도록 권유하는 문화였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은 반드시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부활의 영광 속으로 들어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하여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제자들에게까지 그러한 고난을 감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다릅니다.
당신은 그렇게 받아들이셨지만 그 십자가의 여정을 제자들에게까지 짊어 지우지는 않으십니다.
그보다는 훨신 수월한 방법으로 당신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오히려 당신과는 다른 방법으로 파스카에 참여할 수 있도록 초대해 주십니다.
그래서 당신과 같은 그 고난을 당하지 않아도 주님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 가는 동안 죽음의 세력에 덮치지 않고 무사히 건너가도록 보호해 주십니다.
그것은 당신 말씀을 믿고 빵을 떼어 나눔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성경을 풀이해서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주님의 이름으로 식탁에서 빵을 떼어 나눌 때에 십자가의 고난을 건너가는 파스카의 신비에로 초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강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어리석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 말씀 뿐 만 아니라 동료들의 증언까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제자들의 눈이 뜨여서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은 말씀이 아닙니다.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을 때였습니다.
떼어 주심으로써 믿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나누어 먹고 마심으로써 내 안에 생명이 살게됩니다.
삶은 믿음 후에나 따라오는 후발 주자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삶이 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삶이 바깥에서 품어주지 않으면 믿음은 주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바라보는 성체는 단지 밀떡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현미경같은 눈으로 성체만을 바라기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생명의 기운을 체크하지 못합니다.
요즘 TV광고 중에서 무슨 광고가 가장 많이 나오나요?
그런데 가장 거짓말 같은 광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대출광고와 보험광고가 아닐까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런 광고를 보면 마치 가입하기만 하면 생명을 보장해줄것만 같습니다.
선조들은 노후 대책이 출산이었지만 요즘은 그 자리를 보험이 차지해 버렸습니다.
보험을 들지 않으면 자신의 노후는 보장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출산은 고통이 따르지만 우리에게 생명을 보장해 줍니다.
우리는 생명을 보존하고 살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 초대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생명을 살고 전하기 위해서 파견되었습니다.
재물이 하늘나라를 대신 할 수 없듯이
결코 죽음의 문화가 생명의 문화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하루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신 예수님 안에서 말씀과 만찬으로 더욱 풍성해진 부활을 만끽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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