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다해 사순제2주간 목요일 루카16,19-31 끝없는 나눔(스승)

jasunthoma 2013. 2. 28. 05:15

제가 자랄 때에 부모님 속을 썩여서 집에서 쫓겨난 적이 가끔 있습니다.

그럴 때는 문밖으로 쫓아내고 문을 아주 닫아버립니다.

요즘 아이들은 제발로 당당하게 나갈 배짱이 있는지는 몰라도 제가 어렸을 때는 문밖을 나간다는 것은 죽음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대문 앞에서 천국과 지옥을 체험합니다.

 

오늘 북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의 삶이 현세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현세에서 부자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반면 가난한 라자로는 한마디로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움직일 힘조차 없이 종기투성이 몸으로 부자집 대문 앞에 누워있다가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러다가 라자로가 죽었습니다.

못먹어서 굶어죽었나 봅니다.

그런데 그의 비참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는 그 가난한 라자로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고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신중하게 살펴볼 부분이 있습니다.

부자는 죽어 묻혔지만 라자로는 묻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부자는 살아생전에 호화롭고 즐겁게 살다가 죽어서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고 거창하게 꾸며진 무덤에 안장되었지만

라자로는 묻히지 못했습니다.

무덤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라자로는 묘를 쓸 재간이 없기도 하겠지만 묘를 쓰더라도 찾아주고 기억해 줄 만한 가족과 친척들조차 없는 사람들의 실정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라자로는 마지막까지 불행해 보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결코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의 고통이 고통 그대로 끝나버리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현세에서 아무리 화려하고 즐겁게 살았더라도 그것을 나누지 않았다면 그 다음은 고통과 괴로움이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벌을 주시면 대대로 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베풀 수 있을 때에 자선을 베풀기를 바라십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는 내세에서 물 한 방울조차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실천은 언제 또 어떻게 그리고 누가 해야할까요?

복자 알베리오네는 '참된 사랑은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잊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잊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느날 마더데레사 수녀님이 돌보던 아이가 죽자 수녀님은 아이의 장례를 지켜보시며 강가에 종이배를 한 채 띄우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는 더이상 평화가 없다'

즉 슬픈 사람과 함께 슬퍼하고 기쁜 사람과 함께 기뻐해 주는 것!

슬플 때 잘 울고!  기쁠 때 잘 웃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나눔의 정신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현세에서 끝나지 않는 사랑을 계속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