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다해 12월 27일 금요일 요한20,2-8 (20241227 대구협력)

jasunthoma 2024. 12. 27. 06:50

오늘은 요한사도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제는 빈 무덤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 성탄 대축일로부터 셋째날에 빈무덤 이야기가 소개되는 것일까요??? 빈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는 표징인데 왜 성탄과 연결시켜 놓은 것일까요??? 이에 관해서 세가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1. 예수님을 사랑하던 제자의 마음이 첫아들을 낳았던 성모님의 마음처럼 공허하고 애잔한 마음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빈무덤을 성탄후 삼일째 되는 날에 요한 사도를 통해서 소개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2.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교회는 주님 성탄 대축일 다음날을 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 성인의 축일로 지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셋째날을 요한 사도의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뭐 딱히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축일이 정해졌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저의 짧은 생각으로 억지 해석을 해본다면 성탄과 빈무덤을 연결시켜 놓게 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요람에서 무덤(구유에서 빈무덤) 사이에 파견된 삶이며 그 삶은 스테파노 성인처럼 순교자적인 삶으로 채워지고 있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주님 성탄 첫 삼일동안에 인생-생로병사를 의미하는 구유-순교자-빈무덤을 각각 묵상하도록 복음을 배열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3. 그리고 오늘 빈무덤을 목격한 요한 사도의 축일을 셋째날에 기념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날이 셋째날이기도 하지만 또한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 곧 죽으신 날과 같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굳이 탄생 셋째날에 당신의 부활을 알리는 빈무덤 사화를 전해주는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은 곧 헤로데의 명령으로 무죄한 아기가 죽은 날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으로 무고한 어린 아기들이 무자비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날을 기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탄생은 곧 죽음이다는 의미에서 탄생=죽음의 등식을 성립시켜서 성탄 3일째 되는 날을 부활하신 예수님의 빈무덤을 선포하는 요한 사도의 축일로 지내는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기 전,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사실대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어야 했을까요? 그 상황 전개를 오늘 복음은 무덤이라는 장소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몬에의하면 7차례에 걸쳐서 무덤 진술을 열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하는 7단계의 방식입니다. 즉 죽음의 장소를 7단계에 걸쳐 밝혀냅으로써 그리고 죽음의 실체를 밝혀 냅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합입니다.

1. 먼저는 한 제자가 '무덤'을 찾아 보는데서 출발합니다.

2. 그리고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슴을 확인합니다.

3. 세번째로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하고 알립니다.

4. 네번째로 그 말을 듣고 제자 두 명이 '무덤'으로 갔습니다.

5. 다섯째로 그 중 한 사람이 먼저 다다랐지만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6. 여섯째로 뒤따라 도착한 제자 한 사람이 '무덤'으로 먼저 들어가 예수님을 감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7. 일곱째로 그제야 먼저 다다른 사람도 '무덤'으로 들어갔고 그 모든 상황을 보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일곱단계로 죽음의 장소를 밝혀 보여 주는 진술을 통해서 태초에 있었던 7일간의 창조 시간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확증하기 위하여 일곱차례에걸처 무덤을 확인하였듯이 하느님은 태초에 한 사람의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하여 일곱 날을 만드셨습니다. 이 날들은 생명 보존을 위해서는 단 하루도 소홀히 해서는 안될 소중한 날들입니다. 그리고 이 날들은 이제 당신의 뒤를 이어 모든 생명을 보존하고 탄생을 돕기 위하여 부여된 날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일곱째 날까지 모든 생명을 쉼없이 축복하셨듯이 우리도 당신을 따르라고 생명 보존의 사명을 부여해 주신 날들입니다.

오늘 빈무덤을 보았던 세 제자는 과연 빈무덤을 보고 어떠했을까요? 기뻤을까요? 두려웠을까요? 의심스러웠을까요?

그렇다면 만약, 무덤을 찾았을 때에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 안에 그대로 안치 되어 있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슬펐을까요? 안심했을까요? 실망했을까요?

이렇게 요한 복음에서 빈무덤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빈무덤은 이제는 더이상 무덤이 우리의 영원한 거처거 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빈무덤은 므네메이온인데 므네메이온은 기억하다/회상하다/회포하다/추억하다 는 의미이지만 기념비/기념물/유적 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는 단어입니다. 기념비란 무엇었입니까??? 기념비는 기억하고 회상하고 추억하는 상징물입니다. 그러니까 므네메이온으로 표기된 무덤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빈무덤 말고 시신을 안치하는 무덤은 뭐라고 부릅니까??? 마태23,27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회칠한 무덤에서 무덤타포스입니다. 타포스는 장례/매장/무덤/묘지입니다.

그러니까 두가지 모습의 무덤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무덤 문이 달려있는 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관 뚜껑이 달려있는 무덤입니다. 그러니까 무덤에 문이 달려있는가??? 아니면 관뚜껑이 달려있는가???입니다. 문이 세워져있는가??? 문이 눞혀져 있는가???입니다.

오루로 시에서 운영하는 시립묘원에는 다양한 무덤이 있는데 산타 클라라 수녀원 무덤이 있습니다.

오늘 성탄 팔부축제 내 삼일째 되는 날, 세 제자 막달라마리아-베드로-요한사도는 빈무덤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보고 믿었습니다. 세 제자의 빈무덤 목격이 없었다면, 그리고 빈무덤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부활하지 않고 무덤 속에 그대로 계셨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동방박사들의 공현으로 구유가 주님 탄생을 알리는 아기 예수님의 표징이듯이 빈 무덤 역시 하느님의 아들의 탄생을 알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표징이 됩니다따라서 빈무덤은 우리에게 새로운 탄생이자 새로운 부활의 표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매일 밤을 맞이하며 우리는 무덤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아침에 깨어날 때에는 요람에서 다시 새날을 맞이한다는 희망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잠시후면 무덤이 될 요람을 비워두고 일어나서 주님의 부활을 힘차게 선포할 수 있는 하루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