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제32주간 목요일 루카17,20-25 (20241114 바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의 날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의 날"과 "사람의 아들"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하고 생각해봅니다.
먼저 사람의 아들의 날에 관해서는 네 복음서에서 말하는 관련된 기사를 모두 참조해 볼 수 있겠는데, 먼저 마태오복음 24장에서는 조금 더 상세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태오에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의 재림”이라 하고, 마르코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이라며 그날에 관하여 가르쳐주십니다. 마태오와 마르코에서 사람의 아들의 재림에 관하여 말씀하신 이유는 먼저 예수님께서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자 제자들이 그렇다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게 되느냐고 물었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성전파괴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의 날/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또는 사람의 아들의 재림은 먼저 당신의 몸이 허물어지는 때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허물어지는 날부터 다시 일어나는 날까지입니다. 허물어지는 고통에서 다시 일어나는 기쁨까지 사흘이면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마지막 구절에서도 당신의 마지막 날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려주시는데,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그 날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태초의 한 사람으로 창조되었던 아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본디 한 사람에서 두 사람이 되었고 두 사람은 곧 한 사람에서 시작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눈에 보이는 바깥세상이 아니라 안을 들여다 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본문에서 아담과 하와가 첫음으로 사람의 아들/자녀를 낳았는데 본문에서는 빛을 낳았다고 표현했습니다. 빛은 곧 사람을 알아보는 눈동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신체중에서 유일하게 빛이 나는 곳이 눈동자이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이 눈동자를 떳을 때와 마찬가지로 두 눈을 감게 될 때가 바로 사람의 아들의 날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눈동자 안을 들여다 보려면 눈을 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복음에서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더 나아가 이 말씀을 사도바오로는 1코린토 15장에서 순식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순식간에, 눈 깜박할 사이에, 마지막 나팔 소리에 그리될 것입니다. 나팔이 울리면 죽은 이들이 썩지 않을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성화의 은총의 또다른 표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메시아)라는 호칭을 두고 굳이 당신을 일컬어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신 이유도 바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도 그 자기 성화의 은총에 참여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태초에 부여받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은총의 이름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아주 작은 것, 우리가 숨쉬는 것에서부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은총이 가득한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