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나해 연중제12주간 목요일 마태7,21-29 (20240627 성바)

jasunthoma 2024. 6. 27. 05:19

오늘 복음은 마태5장부터 이어져오던 산상설교를 끝마치는 사실상 산상설교의 마지막 가르침에 해당됩니다. 산상설교(마태5-7)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은 모두 25가지입니다. 이 산상설교를 천천히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마치 십계명을 아주 쉽게 풀이하듯이 가르치신 설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시나이(호렙) 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듯이 예수님 당신께서도 산에 오르시어 진복팔단을 시작으로 오늘 복음에 이르기까지 비유를 들어 모세의 십계명을 아주 쉽게 그리고 평범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듯이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는 모래 위가 아니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집을 모래위에 짓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집을 모래위에 짓는다는 의미가 무엇일까하고 생각해봅니다. 모래는 반석에 반대되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모래가 의미하는 바는 티끌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티끌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통틀어서 반석이라고 한다면 티끌은 한자 한획에 해당되는 흩어진 십계명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흩어진 십계명이 아니라 완성된 십계명 위에 집을 짓는 이들이 슬기로운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당신의 이러한 가르침들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들로서 어리석게도 모래위에 집을 지은 사람들에 해당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 주님!...”하고 하느님을 부르기만 하지, 완성된 십계명을 실행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당신은 이렇게 선언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여기서 불법을 일삼는 자들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불법을 일삼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하고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흔한 일이 불법을 일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불법을 일삼아도 어떻게 되거나 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불법은 무법과 같은 말이지만 흔히 불공정으로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반석이 아니라 모래위에서는 공정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면 모래위의 공정함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고, 불법을 저지른다고 지금 당장에 허물어뜨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를 일컬어서 2데살2,7에서 불법의 신비/무법의 신비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불법은 마지막 날 주님이 나타나실 때까지 비밀스럽게 작용하며 그들이 비밀스러운 활동을 하도록 내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불신과 불경건이 일어나는 것을 묵인하시먼서 자발적 불공정의 시간을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불공정한 악인들은 대낮에 활동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을 속이는 힘을 보내시어 거짓을 믿게 하시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 날까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한 자들이 모두 심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데살로니카 둘째 서간에서 무법의 신비라고 한 것입니다. 즉 그렇게 하는 이유는 마지막 날까지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한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의 하루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시간으로 봉헌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07/12/06 마태7,21.24-27

복음에서는 늘 하늘나라를 차지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가르치는데 도데체 어떤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라는 말인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라는 말에는 양적인 행복보다 질적인 행복에 더 높은 가치를 둔 것이라면 실질적으로 가난한 상태가 가치롭다는 의미다.

 

진정한 가난은 내가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지혜를 내 마음대로 누릴 수 없듯이 진정한 가난도 내 마음대로 살아내기 어렵다. 단순히 먹지 않는데에서, 가지지 않는 데에서, 누리지 않는 데에서만 가난을 찾는다면 그런 가난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늘나라가 사람의 생각으로 그려내어 눈으로 확인 할 만한 물질적인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늘나라는 이 지상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곳을 떠나서도 하늘나라는 존재할 수 없다.

 

높고 낮음을 구분하지 않는 사람은 이 시대에 있어서 진정한 가난한 사람이다. 어느 누구도 그 사람으로부터 불화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불의를 참지 못해 세상을 향해 쓴 소리를 하며 비폭력 시위라도 해야 속이 시원해질 때에 자신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나와 어떤 유착 관계라도 있는지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 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지만 쉽게 간과하는 문제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 하는 사람은 정의를 위해 실천적 참여를 할 때에도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러면 가난한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며, 그 아들 또한 평화를 위해 일하며 진정한 가난한 사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