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사

이스라엘의 역사

jasunthoma 2024. 1. 7. 17:28

윌리엄 P. 브라운에 의하면 존 브라이트(John Bright)의 책 이스라엘의 역사(A History of Israel) 가 신학교에서 널리 읽혀지고 있는 이유를 같은 책 서론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진술 하고 있다. 특히 브라운은 브라이트가 성경, 고고학, 고대 근동지방의 역사들을 두루 다루면서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이스라엘의 믿음이라고 언급한다. 이 믿음은 역사 안에서 본질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성경적 전통을 역사와 분리하여 믿음만을, 혹은 역사만을 연구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역사적 본질을 숙고하도록 비평적인 신념을 확고히 성립시켜주는 결정적 요소라고 평가한다. 따라서 역사는 계시와 신학이 펼쳐지는 무대로서 신학적인 숙고를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분야로 다가온다고 브라운은 진단한다.

브라운의 진술에 의하면 존 브라이트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배경을 그의 스승 올 브라이트(W. F. Albright) 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다. 그들의 만남은 1931-1932년 겨울에 제 4차 텔 베이트 미르심(Tell Beit Mirsim) 고고학적 원정에 참여하여 벧엘을 발굴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후 존 브라이트는 학교를 마치고 모교인 리치몬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는데, 재직 중인 20여년이 될 즈음 웨스트민스터 출판사의 권유로 신학교에서 사용할 교과서(최근의 역사 저술에서의 초기 이스라엘-Early Israel in Recent History Writing, 1956)를 집필하였으나, 3년 후 그의 스승 올브라이트의 영향을 반영한 이스라엘의 역사(1959) 초판을 완성하여 그의 스승 올브라이트에게 바쳤다. 그리고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리치몬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브라운은 브라이트의 1956년 저서(EI)에서 초기 이스라엘의 역사를 진지하게 묘사할 방법을 파악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믿음이었다고 본문(EI, 114)을 근거로 제시한다. 브라운은 고대 이스라엘을 면밀히 파악하려면 고고학과 성경적 증거를 겸비해야한다는 브라이트의 견해에 동조한다. 또한 브라운은 독일 학자 마틴 노트(Martin Noth)의 방법은 지나친 역사적 비평의 산물로서 정치적인 이스라엘과 제도적인 이스라엘의 역사에 초점을 두는 과오를 범했다고 주장(EI, 35)하는 브라이트의 견해에 동의한다. 이어서 브라운은 유대인 학자 예헤즈켈 카우프만(Yehezkel Kaufman) 역시 문자적인 해석에 치중하거나 문자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실수를 범했다는 브라이트의 견해를 수용하면서 역사를 만족스럽게 표현하는 데에는 논법, 근동지방의 고대문화에 관한 지식, 그리고 신학적 감각이 겸비되어야 한다는 브라이트의 견해에 따른다. 결국 브라운에 의하면 브라이트의 방법은 역사를 신학과 혼용되지 않게 종합하려는 시도로 파악된다.

이스라엘의 역사(1959) 는 초판을 기점으로 20년이 넘는 동안 3판에 이르기까지 개정되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초판은 EI 의 요약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브라운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능하면 멀리, 그리고 깊고 넓은 범주로부터 시작하여 범위를 좁혀가면서 이스라엘을 조명해야한다고 밝히고 있는 브라이트의 견해를 강조한다. 그리고 브라운은 이스라엘의 기원은 출애굽과 사나이 광야 체험으로 구체화된다는 브라이트의 견해에 동의한다. 이어서 가나안 정착에 있어서 믿음으로 동맹을 구성하는 사회 안에서 동맹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야훼와의 언약에 합의하는 구조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에 중대한 요소라는 브라이트의 주장을 따른다. 또한 군주정치를 통한 혈연관계의 전환으로부터 야기된 분열, 그리고 그에 따른 유배는 믿음을 강화시켜주었고 그 믿음은 율법에만 의존하도록 만들었다는 브라이트의 진술에 공감한다.

이스라엘의 역사2(1972)과 제 3(1981)을 통해서 브라이트가 자신만의 주장을 하지 않고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역사와 성경에 관해 계속해서 수정 보완을 하지만 결국 이스라엘의 역사가 없이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으며, 하느님이 없으면 이스라엘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브라운은 역설한다. 그러므로 의식적으로 생생한 역사를 망각하지 않고 더불어 신학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기원전 2000년 이전의 고대 오리엔트

먼저 B.C. 2000년 이전의 인류 역사의 흐름을 짚어봄으로써 이스라엘의 기원 시대에 관해 올바른 이해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이 시대의 문화적 업적들을 과소 평가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개념으로 고대 오리엔트에 대해 직접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던 시대에 물려받은 고정관념에 불과하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된 판독할 수 있는 명문(銘文)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B.C. 3000년 초, 즉 아브라함 시대보다 약 1000, 모세 시대보다 약 15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들은 B.C. 4000, 5000, 6000, 7000, 많은 경우에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련의 문화들을 밝혀 냈다. 거기에 비하면 히브리인은 역사상 늦게 등장했다. 성경의 배경이 되는 모든 지역에 걸쳐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문화가 발생하여 고전적인 형태를 갖추고 수백 년, 수천 년 간 발달해 왔다. 그러므로 근동에서 문명의 시작에서 오늘날 까지 선을 긋는다면 이스라엘의 기원은 중간에도 훨씬 못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나일강 유역 구릉지대나, 북부 이라크의 고원지대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부싯돌들이 구석기 시대 전기, 20만 년 전에 인류가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이후 구석기 시대 중기와 구석기 시대 후기까지 인류는 동굴에서 살았다. 이 시기에는 수렵과 채취 생활을 하였다. 그 후 빙하 시대 말기가 끝나고, 온대 지방에서는 우기 시대의 말기가 끝나고 기후가 완화된 B.C. 9000년경에는 인류가 식량을 생산하는 경제적 활동을 하며 곡물들을 경작할 수 있고 짐승을 사육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일은 중석기 시대인 B.C. 8000년경 이전에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인류의 가장 초기의 촌락은 B.C. 7000, 또는 8000년의 석기 시대 말기에 자리잡고 있다. 여리고의 가장초기의 촌락은 이 시대에 속하며 8000년경에는 존재하고 있었다. 여리고는 가장 오래된 정착 촌락으로 알려진 것 가운데 성경 학자들의 관심을 끄는 유적의 하부 지층에서 발견된 주거지이다. 촌락 생활은 B.C. 6000년대를 거쳐 B.C. 5000년대까지 발전을 계속하였는데, B.C. 5000년대에는 거의 모든 곳에 촌락과 성읍들이 세워졌다. 이렇듯 신석기 시대의 여리고는 아브라함 시대보다 이미 5000년 전에 문명을 걸은 선구자였다. 그리고 여리고 뿐만이 아니라 최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B.C.7000년 대에는 이미 성경의 무대를 이루고 있는 모든 지역에 걸쳐 이미 정착 촌락들이 생겼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집트에서도 장착 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서아시아의 경우와는 달리 정착 생활로 이행한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만 다른 곳에서와 같이 이집트에서도 문명은 시작되었음이 분명하다. 이는 아브라함의 시대보다 약 2500년 전의 일이다.

금속이 도입되면서 동석기 병용 시대가 시작된 것은 B.C. 5000년대와 B.C. 4000년대를 거쳐 역사 시대의 문턱인 B.C. 3000년대이다. 이 시기는 놀랄 만큼 다 방면의 문화가 꽃 핀 시대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자의 발명이었다. 팔레스타인에서 B.C. 4000년대는 여러 곳에서 촌락 생활이 발달했는데 동석기 병용 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예는 가술(Ghassulian)문화이다. 가술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여러 곳, 특히 브엘세바 부근과 북부 네겝(Negeb) 지방에서도 동석기 병용 문화의 흔적은 발견되었다.

이집트의 가장 초기의 촌락 문화는 B.C. 500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신석기 시대의 파윰(Fayum A) 문화이다. 이는 B.C. 4000년대를 거쳐 B.C. 3000년대 역사 시대의 문턱까지 이어진다. 메소포타미아와는 달리 왕조 출현 이전의 이집트는 그 지리적 위치로 인해 고립되어 있었다. 역사 시대의 이집트인들의 조상들은, 함 족(Hamitic), 셈 족(Semitic), 그리고 남부지역의 니그로(Negroid)의 혼혈이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정확하게 말해서 B.C. 3000년대 초에 시작된다. 역사의 여명기는 고전적 형태로 굳어진 수메르 문명을 보여준다. 이 지역은 대부분 작은 도시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통일을 향한 노력은 전통과 정서에 정면으로 배치되고 신들을 거역하는 죄로 여겨졌다. 신전 둘레에는 서당들이 흥왕하여 방대한 문헌을 산출해 냈다. 후대의 사본들을 통해 알려진 서사시와 신화의 대부분은 이 시기에 글로 씌었다. 전쟁은 자주 그리고 참혹하게 벌어졌지만 산발적이고 국지적이었다. 어쨌든 대체로 경제적으로 윤택했던 평화로운 시대였다. 수메르의 종교는 고도로 발달된 다신교였다. 신들의 조직은 시의회와 비슷한 형태를 지녔다. 만신전의 우두머리는 폭풍의 신 엔릴(Enlil)이며, 지상의 평화는 언제라도 뒤집힐 수 있는 지방 신들의 세력 다툼으로 생각되었다. 한 도시가 다른 도시에 승리하면 이것은 신들의 왕인 엔릴이 그 도시가 요구하는 권리를 승인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수메르인들은 옳고 그름에 관한 상당히 발달된 의식을 갖고 있었다. 법전 가운데는 오래된 것은 없지만 라가쉬(Lagash)의 우루카기나(Urukagina)의 개혁(B.C. 2400년경)은 법이라는 개념이 아주 오래되었음을 보여준다.

B.C. 24세기에 셈 족 지배자들로 이루어진 아카드 왕조가 세력을 장악하고 세계 역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제국을 창건했다. 아카드의 왕들은 수메르 문화에 도시 국가의 테두리를 훨씬 뛰어넘는 정치적 의의를 부여했다. 아카드의 승리는 아카드어의 보급을 촉진시켰다. 이른바 찬양-서사시를 위한 언어도 이 시기에 생긴 것 같다. 그리고 아카드와 다른 지역에서 권력의 응집이 두드러졌는데 이름 이외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던 에블라(Elbla)라는 지역이다. 최근에 에블라에서 발견된 문서들이 연구되면서 이 시기에 관한 지식은 놀라울 정도로 확대 되었다. 에블라는 B.C. 3000년대 중반에 전성기를 맞이했고 권력은 아카드와 비등할 정도였을 것이다. 이전까지 나오지 않았던 여러 지명들이 언급되었다고 하는데 이 지명들은 예루살렘, 하솔, 므깃도, , 아스돗, 가사 등이다.

B.C. 3000년대는 메소포타미아에서 해독이 가능한 가장 오래된 문서들이 기록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이집트는 통일 국가로 역사에 등장했다. 1왕조 및 제2왕조(B.C. 29세기부터 27세기) 파라오에 의해 고왕조의 기초가 놓였다. 3왕조(B.C. 2600년경)가 일어나면서 이집트는 고전적 개화기로 접어드는데, 이 시대가 피라미드 시대이다. 3왕조와 제4왕조(B.C. 26세기부터 25세기)에 이르기까지 4개의 대 피라미드는 한 개의 무게가 2.5톤인 돌 약 230만장으로 세워졌다. 이것은 확실히 이스라엘이 탄생하기 천년 전의 고대 이집트의 문화력을 보여주는 광경이다. 고왕조 시대 내내 이집트는 아시아와 접촉하고 있었다. 가나안지역과의 접촉은 가나안의 용어들이 이집트어에 흘러들어 온 것만이 아니라 토기의 형태와 그 밖의 다른 물건들의 교역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레바논 목재의 집산지인 비블로스는 나무가 거의 없던 이집트에게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비블로스는 이집트의 지배를 면하기 어려웠다. B.C. 3000년대가 끝나기 전에 비블로스에 살던 가나안 사람들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본뜬 음절문자를 개발했다. 이집트의 국가 조직은 메소포타미아와는 달랐다. 파라오는 곧 신, 태양신인 호루스(Horus)였다. 마아트(maat, 정의)는 신왕인 파라오에 의해 지켜졌으나 고대 이집트의 법전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왕의 칙령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에 법전이 발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집트의 종교는 메소포타미아처럼 발달된 다신교였으나 자신들의 세계를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처럼 불안정하고 문제가 많다고 보지 않고, 창조의 질서가 나일강의 홍수 주기처럼 순환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비록 팔레스타인 지역은 유프라테스 강 유역이나 나일강 유역의 문화에 비길 만한 문화가 발달하지는 못했지만 B.C. 3000년대에는 이 지역에서도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여 주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나중에 성경에 나타나는 도시들 중 다수는 이시기에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예리고, 므깃도, 벧산, 아이, 게셀 등이다. 에블라 문서는 예루살렘을 비롯한 다른 도시들도 언급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B.C. 24세기에는 세력이 수메르 도시 국가들로부터 대 제국을 창건했다. 이 시기에 후리족(Hurrians)은 동부 티그리스 지역으로 침투해 들어왔고, 아모리족은 상부 메소포타미아 열대에서 그 지반을 더욱 견고히 굳히고 있었다. 구티족인 아카드의 세력을 멸망시킴으로써 수메르 문화가 부흥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우르 제3왕조(B.C. 2060-1950년경) 아래에서 꽃 피게 되었다. 이 왕조의 창건자 우르 남무는 많은 문화적 활동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을 만들었다. 이스라엘이 기원한 시대에 즈음해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문화의 전체 조류가 밀려왔다가 완전히 빠져나갔다. 수메르 문화는 1500년이 넘게 지속되다가 소멸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미 이렇게 오랜 역사를 지닌 세계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집트는 제6왕조가 끝나기 전에 국가의 통일적인 권력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아시아의 반유목민들이 나일강 삼각주로 침입해옴으로써 사태는 너욱 나빠졌다. 혼란은 극심했고 법과 질서는 파괴되었으며 교역은 부진해졌으며 곤궁과 기아가 만연되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인 B.C. 23세기부터 20세기에 팔레스타인의 삶은 밀려들던 유목민 침입자들에 의해 상당히 붕괴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많다. 새로 이주해 온 유목민들은 그당시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로 밀려오고 있었던 아모리 족으로 알려진 서북 셈 족계 민족들의 일부였을 것이다. 이시기에 이집트에 침입했던 셈 족도 같은 종족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뒤를 따라온 사람들 중에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과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고대 오리엔트와 이스라엘의 기원사

-1: 이스라엘이 기원한 세계 -

대략 B.C. 2000-1550년은 이스라엘의 기원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반 유목 민족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사건이 발생했고, 그 중에 이스라엘의 선조들도 끼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에블라 문서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초기 청동기 시대(B.C. 3000년대)에 생존했다. - 같은 책, 70, 각주 1 참조; 어셔(Ussher) 대주교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B.C. 1996년에 출생한 것으로 밝혔으며, B.C. 1728년에 이집트로 들어갔다고 추산했다. - 같은 책, 2007, 112-113 참조.) 정확하게 말해 B.C. 13세기 때부터 이스라엘이라 부르는 한 민족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했다는 사실이 고고학적 자료나 당시의 기록들에 의해 입증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선조들인 이 유랑자들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그 전사(前史)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민족의 전사라는 것도 그 민족의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 곳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다른 지역에서 왔고 이 땅으로 오기까지 사막에서의 방황, 그에 수반되는 경이로운 경험들, 그리고 그들은 그 이전 이집트에서 오랜 세월의 고된 종살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의 선조들은 머나먼 메소포타미아에서 와서 그들이 지금 자기의 것이라고 부르게 된 땅에서 유랑한 것 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이스라엘이 기원한 시기의 주변 세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스라엘의 기원 시대라 함은 아브라함이 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이동하여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로 이동하는 과정에 포함된다. 관점의 포인트를 먼저는 이집트가 몰락해 가고 메소포타미아가 막강한 기세로 그 세력이 부흥하는 B.C. 1750년경을 전환점으로 나누어 고찰하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두 기둥으로 삼고 그 가운데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동향을 고려해 봄으로써 후대에 가서야 태동하게 될 이스라엘의 시대적 배경을 고고학적 증언들과 성경 전승의 이야기를 토대로 전개해 보도록 하자.

1. B.C. 2000-1750년경의 메소포타미아

B.C. 2000년부터 1750년경의 메소포타미아는 우르 제3왕조와 함께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서로 경쟁하는 군주들에 의해 쇠퇴와 불안정의 시대가 이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아모리족이라 불린 사람들의 역할이다. B.C. 3000년대 말기부터 서북 셈 족의 반 유목민들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로 밀려들어 오면서 팔레스타인을 유린하고 상부 메소포타미아를 아모리족의 땅으로 바꾸어 놓았다. B.C. 18세기 중엽까지 하부 메소포타미아에서 경쟁한 왕조는 이신(Isin)왕조와 라르사(Larsa)왕조였는데 두 왕조 모두 아모리족 군주가 다스렸다. 이 두 나라가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약화되자 곧 다른 경쟁 국가가 국력을 튼튼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경쟁 국가들 중 두드러진 나라는 이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바빌로니아(Babylon)였다. 이 혼란한 정세를 이용하여 한 아모리족 왕조인 바빌로니아 제1왕조가 B.C. 1830년경 생겨났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은 경제적 불황을 가져왔을 것이다. 이 시기에 두 개의 법전이 나왔는데 최근에 발견된 수메르어로 된 이신 왕조의 리피트 이쉬타르(Lipit-Ishtar)에 의해 B.C. 1870년경에 공포되었고, 다른 하나는 아카드어로 된 것으로서 에쉬눈나(Eshnunna)왕국에서 B.C. 18세기 이전에 나온 것이다. 이 두 법전은 함무라비 법전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있다. 함무라비 법전같이 이 두 법전은 성경의 언약 법전인 탈출기 21-23장과 유사한 점들을 보여주고 있어 이스라엘의 법률 전승이 이와 비슷한 배경에서 발전해 나왔음을 보여준다.

상부 메소파타미아에서는 마리와 아시리아가 자리하고 있었다. 티그리스 강 상류에 있는 도시 앗수르의 이름을 본 따 불리운 아시리아는 아모리족 군주들에 의해 통치되지 않았던 몇 안 되는 메소포타미아의 국가들 중 하나였다. 우르 제3왕조의 몰락 이전부터 시작해서 B.C. 19세기 내내 아시리아는 북부와 서북부 지역에 대하여 활발한 통상 확대 정책을 추구했다. 결국 아시리아, 마리, 바빌로니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은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세력 다툼은 가열될 수밖에 없었다.

2. B.C. 2000-1750년경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정치적 혼란과는 대조적으로 족장 시대 초기의 이집트는 안정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B.C. 2000년대 초에 이집트는 중왕조의 파라오들 아래에서 새로운 번영의 시대로 접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번영한 시대였다. 1중간기의 혼돈이 끝나고 이집트는 제11왕조 아래 재통일 되었다. 이때부터 중왕조 시대가 시작한다. 11왕조가 이집트 전체를 통치한 기간은 짧았으나 그 통치권이 총리였던 아메넴헷(Amenemhet)에게 넘어감으로써 제12왕조가 시작되었다. 이 왕조는 수도를 테베에서 멤피스로 옮기고 200년 이상 통치했다. 이 왕조는 이집트 역사 전체에서 가장 안정된 시대였다. 12왕조의 파라오들은 국가의 번영을 촉진시킬 목적으로 많은 사업들에 착수했다. 운하, 호수, 나일강 홍수를 잡아 두는 저수지, 땅을 개간하고, 요세 축조, 구리 광산개발로 인하여 이집트는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번영을 누렸다. 이와 더불어 의술, 수학, 교훈적 저술, 설화, 자전적 이야기, , 예언서들을 비롯하여 여러 문학 작품들이 산출되었다. 즉 이집트 문화의 황금시대였다. 이때에 그들은 다른 지역을 원정하여 제압했는데 남쪽으로는 제2폭포에 이르는 나일강 유역과 누비아(Nubia) 너머, 서쪽으로는 리비아인들의 지역, 동쪽으로는 시나이 반도의 광산을 확보하였고, 그들의 지배권이 팔레스타인, 베니게, 남부 수리아, 비블로스의 대부분까지 미치고 있었다.

3. B.C. 2000-1750년경의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B.C. 2000년부터 1750년경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은 격변과 혼란의 시대를 벗어나 점차 회복을 찾아가는 시대였다. B.C. 19세기 이전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은 요세화 되지 않은 촌락들이 산재했으나 이러한 부락들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요르단강 동부지역, 네겝, 북부 요르단 동편, 남부 요르단 동편이 그러하였다. 반면에 서부 팔레스타인은 B.C. 19세기가 시작되면서 새롭고 활기찬 문화적 영향에 자극되어 두드러진 회복세를 보였다. 그러나 중앙 및 남부 고원지대인 세겜과 예루살렘에서는 정착인구가 계속 희박하였다. 새로운 이주자들이 아모리인들, 즉 메소포타미아 민족들과 같은 서북 셈 족이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들의 생활양식은 시누헤의 이야기에 의해서 예시되지만 특히 창세기의 이야기들에 의해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면 이스라엘 선조들의 이주는 아모리인들 이동의 일부였다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할 즈음인 B.C. 13세기에는 아모리인과 가나안인을 뚜렷이 구분할 수 없게 됨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이즈음 이집트는 제12왕조의 뒤를 이어 제13왕조는 급속히 쇠퇴해 가고 있었다. 13왕조가 시작된 이래로 서부 삼각주의 여러 지방들이 이른바 제14왕조의 영도 아래 독립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시아 민족들이 북부 이집트 전 지역에 침투해서 기반을 잡기 시작했으므로 이 지역에 대한 파라오의 지배권은 점차 약해졌다. 곧 이집트는 이방인이 통치하는 암흑시대로 빠져들게 된다.

4. B.C. 18세기 메소포타미아의 세력다툼

우르 제3왕조의 몰락 후 메소포타미아는 200년 동안 경쟁하는 군소 왕조들의 각축무대로 남아있었다. 이런 경쟁 왕조들 중 이신, 라르사, 바빌로니아가 있었는데 라르사와 이신 왕조는 바빌로니아 왕조에 의해 정복되었다. 이 정복을 통해 림신(Rim-sin)의 지배권은 북쪽으로 함무라비의 아버지 신 무발릿이 통치자로 있었던 바빌로니아 국경 지방까지 확장되었다. 한편 상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마리와 아시리아가 있었는데 그다지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짧은 기간이나마 마리가 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유력한 나라가 되었다. 이 세력의 각축은 마리, 아시리아, 또는 라르사가 아닌 바빌로니아에게 돌아갔다. 이 승리의 구축자는 함무라비였다. 함무라비는 자그로스 산맥과 사막 사이의 강 유역의 대부분과 남으로는 페르시아 만, 그리고 엘람의 일부를 포괄하는 상당히 큰 제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또한 그의 지배권은 북쪽으로 니느웨, 서북쪽으로 유프라테스 강 중류까지 영향을 미쳤다. 함무라비 아래서 바빌로니아는 괄목할 만한 문화적 번영을 누렸다. 바빌로니아는 큰 도시가 되었다. 지금은 그 건물들은 물에 잠겨서 복원할 수는 없지만 마리의 건물들보다 더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특이할만한 것은 마르둑(Marduk) 신을 모신 만신전과 에테메난키(Etemenanki) 신전은 당시 세계의 불가사의 중 하나였다. 또한 문학과 온갖 형태의 학문이 흥왕했는데, 여러편의 고대 서사시들, 예를 들면 바빌로니아의 창조 설화와 홍수 설화, 단어집들, 사전류, 고대 문법서들, 대수학 논저들, 천문학서들, 온갖 종류의 지식의 편집물과 분류서들, 점성술, 주술, () 관찰법, 의술과 과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함무라비의 업적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치세 말기에 공표된 법전이었다. 이 법전은 이미 있었던 우르 남무 법전, 리피트 이쉬타르 법전, 에쉬눈나 법으로 표현되는 법률 전승을 새롭게 체계화한 것이었다. 후대의 아시리아 법들은 성경의 언약의 책인 탈출기 21-23장과 마찬가지로 동일하거나 비슷한 전승을 체계화한 것들이다. 이 법전은 당시의 사회 구성을 밝혀주고 또한 오경의 율법들과 유사한 규정들이 많다는 점에서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문헌이다.

5. B.C. 18세기 이후 오리엔트의 혼란기

함무라비가 바빌로니아를 전성기로 끌어 올렸을 때 함무라비왕조는 급속히 쇠퇴해갔다. 민족들의 이동으로 족장 시대의 후반은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또한 이집트에는 힉소스 족이 정복하여 이른바 제15왕조를 창건했는데 이 왕조는 100년 동안(B.C. 1650-1542년경) 다스렸다. 많은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이 시기에 이집트로 들어갔다고 한다. 침략자들로부터 이집트를 해방시키려는 투쟁이 일어난 것은 힉소스 족이 한 세기 동안 통치한 뒤였다. 각고의 노력으로 이 투쟁은 성공하고 제18왕조의 창건자로 여겨지는 아모시스(Amosis, B.C. 1552-1527)는 그들을 팔레스타인까지 추격하여 3년동안 전투 끝에 그 땅의 남쪽 국경지대에 있는 샤루헨(Sharuhen) 요세를 함락시켰다. 이집트가 당시 세계에서 최강대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 즈음 바빌로니아를 비롯하여 팔레스타인에는 후리족을 비롯하여 새로운 민족들이 침입해 왔는데 그중에서 헷 족의 침입이 부각된다. 반면에 이집트는 힉소스 족을 추방한 제18왕조(B.C.1540년경)가 힘차게 출발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이집트는 부흥하고 메소포타미아는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이 시기에 이집트에 들어가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계속해서 살펴보아야 할 문제이므로 다음 발표자에게 넘기고 본 발표를 끝맺도록 하겠다.

지금까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두 기둥으로 삼고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았다. 이스라엘의 기원시대라 할 수 있는 B.C. 2000년경부터 B.C. 1550년경까지는 성경 전승에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야곱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조명해주는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족장시대 전체를 통하여 메소포타미아는 지속적인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진 적이 없었고 이집트도 두 차례를 제외하면 항상 불안과 혼란을 거듭하며 흥망성쇠를 거듭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팔레스티나는 성경 전승에서 말하듯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서 그들의 자손이 땅의 먼지만큼 많이 불어날 것이라고 보기에는 척박한 지역이 너무 많은 것 같아 보인다. 오히려 인류문명의 발상지에서 쫓겨난 족장들의 은신처로 적절한 장소를 제공해왔다고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세상권력과 민족세력의 관심 밖에서 드러나지 않게 그들 나름의 버림받은 역사를 써야만 했다. 단지 여러 족속(아모리족, 힉소스 족, 헷족 등)들이 두 문명발상지를 향하여 끊임없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교차로 역할로서 그 명맥을 드러내는 정도에 머물렀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팔레스타인은 버림받은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이라는 말씀대로 이스라엘의 선조들의 신앙이 활짝 꽃필 날을 준비하는 거룩한 장소였다. 신앙의 젖과 꿀이 흐르고 믿음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만큼 많이 번성할 장소로서 가장 적합한 장소가 바로 가나안 땅이었다고 생각한다.

 

2: 족장시대

1. 족장설화의 문제점과 연구방법

족장들에 관한 이야기들은 성경이 처음 여섯 권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위대한 신학적 역사의 장을 이루고 있다. 이 전승들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같은 유형의 문헌들 가운데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이 문헌들의 자료의 성격 자체를 당시 역사적 사료를 토대로 신빙성을 검토해 본다면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문제점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족장 설화들은 분명히 그 안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사건들과 같은 시대의 역사적 기록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엄격한 역사학적 방법에서 제외되지 않으며, 오히려 성경도 다른 전사 기록들에 적용되는 엄밀한 조사를 감당해 닐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족장 설화는 사건 당시의 역사적 기록들이 아니다. 그 전승들이 역사상의 회고담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되었지만 이스라엘의 전사에 관한 사료의 가치는 전혀 없지는 않더라도 극히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비록 전승들에 대한 새롭고 좀더 긍정적인 연구가 요구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연구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기원한 시대를 비춰 준 고고학적 연구였다.(이스라엘의 기원 시대와 동일한 시기의 문헌들이 확보되었다. B.C. 18세기의 마리 문서(Mari texts, dir 25,000), B.C. 19세기의 갑바도기아 문서(Cappadocian texts), 바빌로니아 제1왕조의 문헌들(주전 19세기-16세기), B.C. 15세기의 누지 문서(Nuzi texts), B.C. 17세기와 15세기의 알라라크 서판들(Alalakh tables), 라스 샴라 서판들(Ras shamra tablets, B.C. 14세기경의 서판), 이집트 중왕조 시대의 저주문서(Execration Texts)와 그밖의 문헌(B.C. 20세기부터 18세기), 북부 시리아의 에블라 문서(Ebla texts, B.C. 30세기 중반). -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의 역사, 엄성욱 옮김, 은성, 2007, 96-97 참조.) 이 고고학적 연구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주변 상황을 고려한 객관적인 기준을 세우는데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족장 전승들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현재의 성경의 자료들과 그 자료들이 말해 주고 있는 사건들과의 사이에는 비록 복잡하지만 면면히 이어져 온 생생한 전승의 흐름이 있다고 추론할 수있다.

족장 전승들의 형성 배경은 J자료와 E자료에서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자료들이 단일한 설화(JE)로 편집되었을 때(B.C. 721년 이후), 한쪽의 줄거리(보통 J)를 토대로 하여 다른 쪽은 그것을 보충하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J자료와 E자료의 출처가 된 전승군이 구전되었는지 문서로 전해졌는지, 아니면 그 두 가지 모두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하나의 완벽한 전승사를 재구성해 보려는 시도들은 너무나 사변적이고 거의 객관적이지 못한 증거를 토대로 한 것이므로 신뢰할 수 없다. 다만 전승들이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는 사건들과 관련해서 따로, 대부분 드보라의 노래처럼 영웅시의 형태로 생겼다고 가정할 수 있을 뿐이다. J자료의 편집 연대를 유배기로 추정하는 것은 몇 가지 이유로 보아 거의 가능성이 없다. 왜냐하면 족장들이 당시에 이스라엘의 율법에서 금지 된 행위들을 행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아브라함이 이복누이와 결혼함(창세 20,12; 신명 18,9.11; 신명 27,22), 야곱은 자 자매의 남편(창세 29; 레위 18,18), 아브라함이 신성한 나무를 심음(창세 21,33; 신명 16,22), 야곱이 신성한 기둥을 세움(창세 28,22). -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의 역사, 엄성욱 옮김, 은성, 2007, 101 참조.) 저자가 유배기의 사람이라면 독자들에게 충격이 될 줄 알면서 선조들이 이런 행위들을 행한 것으로 묘사할 수 없었을 것이며 이제까지 믿었던 모든 것들이 허망하게 무너져 버린 것처럼 보였던 유배기에 하느님의 확실하고 영원한 약속들을 강조하고 있는 족장 이야기들은 새롭게 현실로 다가왔을 것이지만 그 이야기들이 그처럼 늦은 시기에 쓰였을 것으로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족장들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오랜 전승들과 일치하지 않았다면 B.C. 10세기의 저자가 그 이야기들을 끌어다 쓸 가능성은 없다. 그래서 족장 설화들이 고대의 전승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 증거에 의해 뒷받침 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이나 성경 자체에서 나오는 증거 자료가 지닌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의 기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스라엘의 기원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창세기의 모든 설화는 아직까지 다른 문헌에서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다. 또한 당시의 어떤 문명의 기록에도 히브리인 선조에 관해 언급한 내용이 없다. 고고학이 족장 시대에 대해 많은 사실을 밝혀 주고, 또 전승의 고대성과 신빙성을 입증하는데 큰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의 증언은 간접적이다. 그 증언의 뒷받침으로 창세기에 나온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묘사가 좀 더 개연성이 있음을 나타내 주었고 그 묘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배경을 제공해주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스라엘의 기원은 실제로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성경 표면상으로는 아브라함이 아내, , 롯의 아내, 그리고 몇 명의 하인들만 거느리고 하란을 떠난 것으로(창세 12,5)보인다. 그러나 곧 롯과 아브라함은 큰 씨족들의 우두머리임이 분명해진다(창세 13,1-13). 아브라함이 318명의 전사를 전장에 투입할 수 있었다는 사실(14,14)은 상당히 큰 씨족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을 전멸시킨 것(창세 34)도 시므온과 레위라는 두 명의 인물이 아니라 두 씨족의 행위였음이 분명하다(창세 49,5-7). -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의 역사, 엄성욱 옮김, 은성, 2007, 104 참조.) 신학적으로는 모든 이스라엘인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들은 서로 다른 여러 종족의 후예들이었다. 각각의 씨족은 나름의 이주 전승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궁극적인 기원이 아브라함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하나의 신앙 아래 이스라엘의 부족동맹이 형성됨으로써, 전승들은 민족 전승으로 확립되었다.

2. 족장설화의 역사적 배경

족장들의 이야기들은 B.C. 2000년대, 특히 앞에서 개략적으로 이야기한 세기들의 시대적 환경에 일치하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족장들의 이름 중 그 어느 것도 성경 시대 전체에서 다시는 후대 이스라엘에서 고유 명사로 등장하지 않고 족장들과 관련된 자들의 이름도 마찬가지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야곱은 상부 메소포타미아의 샤가르 바자르(Chagar-bazar)에서 나온 B.C. 18세기의 문서에 나오고, 힉소스 족(Hyksos)의 추장의 이름으로 나오고, B.C. 15세기 투트모세 3세의 목록에는 팔레스타인 지명으로 나오며, 그리고 동일한 어근을 지닌 이름들은 B.C. 18세기의 이집트의 목록과 마리 문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아브람(Abram), 나홀(Nahor), 베냐민, 즈블론, , , 이스마엘, 레위, 아셀, 이사갈 등은 저주문서, 마리문서, 아시리아 문서, 이집트 문헌 등에서 발견되며, 에블라문서에서도 이스마엘, 에서, 사울, 다윗, 이스라엘과 성읍들의 이름인 팔리가(Phaliga, 벨렉), 사루기(Sarugi, 스룩), 틸투라키(Til-turakhi, 데라), 나쿠르(Nakhur, 나홀), 하란 등이 나온다. -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의 역사, 엄성욱 옮김, 은성, 2007, 106-107 참조.)

오경의 기사가 최초로 성문화 된 B.C. 10세기에 와서는 그 족장들의 관습들 중 대부분의 의미가 더 이상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이야기와 당대 족장들의 관습들과의 밀접한 유사점들이 후대의 이야기들에서가 아니라 오직 족장들의 이야기들에서만 발견된다는 사실은 후대의 이스라엘의 율법에서는 더는 고려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아브라함이 자신의 종 엘리에셀에게 상속권이 넘어갈 것을 걱정하는 이야기(창세 15,1-4)는 누지문서에 나오는 당시 자식이 업는 부부는 양자를 들여 자신을 부양하게 하고 자신이 죽은 후에 유산을 상속하게 했다. 또한 사라가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준 것처럼(창세 16,1-4) 누지에서는 부부 사이에 자식이 없으면 아내가 남편에게 자기를 대신할 첩을 얻어 줄 의무가 있었다. 또한 라반과 야곱의 이야기(창세 31)에서 나오는 관습들은 모두 누지인들의 관습을 비롯하여, B.C. 2000년대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인 북북 시리아의 아라라크(Alalakh)지방의 문서에서도 행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관습은 후대 이스라엘 율법에서는 명맥히 금지되었다(신명 21,15-17). -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의 역사, 엄성욱 옮김, 은성, 2007, 108-109 참조.)

족장들의 생활 양식은 창세기에 묘사되어 있는 유랑의 성격과 B.C. 2000년대 초기의 문화적, 정치적 상황과 잘 들어 맞는 것은 분명하다. 족장들은 천막 생활을 하며 계절에 따라 목초지를 찾아 팔레스타인 주변을 유랑하고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로 여행도 하는 반유목민으로 묘사되어있지만 그들은 진짜 유목민은 아니었다. 그들을 B.C. 2000년대의 목축 유목민들의 정착지를 끊임없이 습격하고 촌락민들을 괴롭히던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와는 반대로 목자들과 농사를 짓는 촌란민들사이에 이원적인 사회의 두 구성원으로서 상호 도움을 주면서 평화롭게 사는 것이 그들의 생활 방식이었다.(그들은 흔히 성읍 근처에서 야영을 했고, 오랫동안 머물면서 땅을 경작하기도 했다(창세 26,12). 그러나 롯을 제외하고는 그들은 도시들에 계속 정착하지 않았고 도시의 주민들과 동화되지도 않았다. 주검을 매장하기 위해 약간의 땅 외에는 토지를 소유하지 않았다(창세 23; 33,19; 50,5). 시누헤(Sinuhe)의 이야기나 마리문서에 나오는 반 유목 생활을 하는 목축업자들은 족장들이 따랐을 것으로 생각되는 유목생활과 가장 비슷한 유형의 모습을 제공해 준다. 또한 족장들의 모습은 이집트의 베니 하산(Beni-Hasan)에 있는 B.C. 19세기의 한 무덤 벽에 그려져 있는 유랑민들처럼 여러 빛깔의 옷들을 걸치고 나귀에 짐과 아이들을 싣고 도보로 옮겨다니는 모습을 닮았을 것이다. -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의 역사, 엄성욱 옮김, 은성, 2007, 110-111 참조.)

족장시대의 연대는 창세기 12-50장에 반영된 사건들을 토대로 대략 B.C. 20세기부터 17세기까지의 시기와 가장 잘 부합한다. 그러나 성경을 비롯하여 성경외의 다른 증거들로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성경에 열거된 족장들의 수명을 근거로 성경의 연대기를 확정할 수 없다. 예를 들면 탈출기 12,40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머문 기간을 430년이라고 하는 반면 칠십인역(Septuagint)은 같은 곳에서 족장들이 팔레스타인에 머문 기간을 이 430년 안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리고 창세기 12-50장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 중 어느 것도 다른 문헌을 통해 증거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현재 족장 전승들은 대부분 B.C. 2000년대 초의 시대적 상황과 부합한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작명법, 아모리족 및 이와 비슷한 집단들의 이주시기와 맞아 떨어지는 상황, 그리고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우르 제3왕조의 세력을 멸망시키는데 기여했고, 그들 가운데는 후대에 이스라엘 민족의 구성원이 된 사람들의 선조들도 함께 섞여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창세기 설화에 나오는 팔레스타인은 중기 청동기 시대의 팔레스타인이다. 라반과 야곱의 이야기(창세 31)가 후기 청동기 시대에 이스라엘 선조들의 일부가 북방에서 추가로 이주해 왔다는 사실을 반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오게 된 계기가 되는 민족 이동은 수세기에 걸쳐 지속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언제 이집트로 내려갔느냐고 묻는 것은 문제를 잘못 제기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때에 이스라엘 민족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의 조상들이 같은 시기에 이집트로 들어갔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내려간 정확한 연대를 산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족장시대의 끝을 확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3. 히브리인의 선조들과 역사

족장 설화들의 역사적 신빙성을 높게 평가한다면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원래 상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왔으며, 이 지역의 반 유목민과 친밀한 혈연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전승은 하란이 아브라함의 여정의 출발점이며(창세 11,32; 12,5), 아브라함의 친척 라반의 고향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한다(창세 27,43; 28,10; 29,4). 또한 B.C. 2000년대 히브리인들과 유사한 주민들이 실제로 거기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북부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출토된 증거들을 비롯하여,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예언 현상(판관시대의 드보라, 사무엘 등)과 거의 유사한 현상들이 마리 문서에도 나오는 점들, 계약 법전(탈출 21-23)으로 알려진 이스라엘의 판례법이 에쉬눈나(Eshnunna) 법전과 함무라비 법전을 통해 잘 드러나는 메소포타미아의 법률 전승과 유사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반면에 가나안이나 이집트의 문헌과는 거의 유사성이 없다. 표면상으로 에덴동산, 바벨탑을 비롯하여 창세기 1-11장에 수록된 여러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메소포타미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시원사(始原史) 배후에 있는 전승들은 B.C. 2000년대 전반에 이주해 온 집단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일 것이다.

칠십인역은 아브라함의 출생지를 상부 메소포타미아 하란으로 보는 듯하다(창세 24,4-7).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이주해 왔다는 전승(창세 11,28.31; 15,7)은 그리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만 우르와 하란은 교역과 종교상으로 유대관계가 있었다. 두 곳이 모두 달의 신을 숭배하는 제의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서북 셈계 씨족들이 남부 메소포타미아로 침투했다가 우르 제3왕조가 몰락한한 후 혼란한 시기에 북쪽의 하란으로 이주했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어쨌든 족장 전승에 의하면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가 거의 없다.

이스라엘 선조들은 주로 서북 셈 족 출신이었지만 성경은 모압, 암몬, 에돔(창세 19,30-38; 36)만이 아니라 미디안을 비롯한 수많은 아라비아 부족들(창세 25,1-5.12-18)과도 혈연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은 아람인들에 대해 특히 강한 혈연의식을 갖고 있었다.(히브리인들의 메소포타미아 친척들의 고향은 아람나하라임(Aram-naharaim)이나 밧단아람에 위치해 있고, 라반은 거듭 아람인이라 불리고 있다(창세 25,20; 28,1-7; 31,20.24). 그리고 창세기 1021-31에서는 전통적으로 히브리인들의 선조로 알려져 있는 아벨의 족보와 나란히 아람인들이 셈의 후손으로 나오 있고, 2020-24에서는 아람인과 갈대아 인이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홀의 후손으로 나오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후대에 저희 조상은 떠돌아다니는 아람인이었습니다(신명 26,5).”라는 말로 시작하는 신앙고백을 암송했다. 그러나 아람인들이 B.C. 12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문헌에서 발견되는데 마리문서(B.C. 18세기), B.C. 2000년 이전의 문헌에서도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명칭들이 아람 민족과 관계가 있는지는 정확치 않다. -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의 역사, 엄성욱 옮김, 은성, 2007, 122-123 참조.) 아람어도 서북 메소포타미아에서 생겨나서 여러 지역과 그 변두리에 살던 종족들이 아람 족의 영향안에 들어옴에 따라 점차 넓게 퍼져 나갔을 것이다. 그러한 종족들 가운데 아모리 족이 있는데, 아모리 족이라는 말은 서부인을 의미하는 아카드어로서 족장 시대와 그 이전부터 상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의 다양한 서북 셈 족들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자신의 유래지를 아람 평원으로 기억하고 자신의 조상을 유랑하던 아람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여러 이유로 그들은 B.C. 2000년대 초에 갈라져 나와서 우리가 전혀 모르는 다른 무리들과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그 땅에 정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친족 의식을 갖고 있었던 비슷한 혈통의 다른 부족들과 접촉했다. 그 후에 그들은 성경의 설화가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쳐 통합과 분열을 반복하면서 점차 성장하게 되었을 것이다.(: , 이스마엘에서의 이야기)

위에서 열거한 증거들로 인하여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생애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역사상 실존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족장들은 개별 인물들이 아니라 규모가 큰 씨족들의 우두머리였다. 복잡한 씨족 이동에 얽힌 이야기를 다 알려주지 않고 단순화된 족장 이야기안에서 개인은 집단과 섞여 있으며 개인의 행적은 집단의 행적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족장들을 동명의 씨족의 시조들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려서는 안된다. 이 집단들의 지도자들인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실존 인물들이었다는 것과 B.C. 2000년대에 생존했던 씨족 족장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히브리인의 유래에 관해서 전승을 살펴보면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은 318명의 하인들을 이끌고 롯과 그의 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침략자 왕들을 추격하는데 이곳에서 아브라함이 히브리인으로 불린다. 창세기 설화에서 오직 이곳과 요셉 이야기에서만 히브리인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이 밖에도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부를 때에 창세 39, 14.17; 탈출 2,6; 1사무 4,6.9에서,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방인에게 자신의 신원을 밝힐 때에 창세 40,15; 탈출 3,18; 5,3에서 히브리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 이렇게 히브리인이라는 이름은 구약 성경에서 가장 초기 설화에서만 나오며, 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을 부를 때에 이스라엘인들(Ben Yisra’el)이라 불렀다. 성경에 히브리라는 말이 등장하는 때와 비슷한 시기의 문헌에 나오는 아피루(‘Apiru), 하피루(Hapiru), 하비루(Haviru)로 알려진 무리들과의 관계는 많은 논의가 진행되었다. 여러 문헌들에서 아피루가 언급되지만 그들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문헌은 아마르나 서간들(B.C. 14세기)일 것이다.(이피루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우르제3왕조, 바빌로니아 제1왕조에 해당하는 누지 문서(B.C. 15세기)에서 그들의 역할을 전하고 있으며, 마리(B.C. 18세기)와 알라라크(B.C. 17세기와 15세기)에서 출토된 문서들에서 그들은 상부 메소포타미아에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또한 갑바도기아 문서(B.C. 19세기), 보가즈쾨이(Boghazköy) 문서(B.C. 14세기)에도 나오고, 제국 시대의 이집트 문서들(B.C. 15세기부터 12세기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의 역사, 엄성욱 옮김, 은성, 2007, 126-127 참조.) 이 서간에서 아피루들은 팔레스타인과 그 인근에서 평화를 교란시키는 자로 등장한다. 하지만 B.C. 3000년대 말부터 B.C. 11세기경까지 서아시아 전 지역에 걸쳐 산재해 있었던 한 종족을 이스라엘의 선조들과 동일시 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반면 아피루/하피루라는 말이 어디에서 나왔든 원래 일단의 종족이 아니라 사회의 한 계층을 가리켰던 것 같다. 이러한 것은 그들이 지리적으로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었다는 점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름이 하나의 언어권에 속한 것이 아니고 지역에 따라 달랐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그래서 종족과 언어를 달리하는 잡다한 사람들을 일컬어서 아피루라 불렀을 수도 있다. 이말은 기존 사회 체제 속에서 기반 없이 소외되어 살던 시민권 없는 계층을 의미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점을 비추어 보면 히브리인 선조들을 아피루와 동일시 할 수 는 없겠지만, 그들을 이러한 계층에 속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람세스2(Ramesses II) 치하의 이집트 종살이를 했던 아피루 가운데 이스라엘의 구성원들이 공존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협정이나 조약을 맺을 때 가끔 아피루의 신들’(탈출 3,18; 5,3; 7,16)을 두고 맹세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족장들이 B.C. 2000년대 역사상 실존 인물이었다는데 만족하지 말고 그들의 종교의 역사에서 그들의 위치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모세를 이스라엘 종교의 창시자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앙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성경의 중심 주제인 구속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자료(J)에 의하면 족장들의 하느님은 야훼(Yahweh)였다.(아브라함은 그에게 보여줄 곳에서 땅과 자손을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하란을 떠났고(창세 13,1-3), 약속을 거듭 갱신했고(창세 15,5.13-16; 18,18), 언약에 의해 보증되고(창세 15,7-12.17-21), 약속은 이사악(창세 26,2-4)과 야곱(창세 28,13-15; 35,11), 그리고 모세(탈출 3,6-8; 6,2-8)에게도 주어져다. 이렇게 보면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신앙의 선조가 된다. -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의 역사, 엄성욱 옮김, 은성, 2007, 129 참조.) 다른 자료(EP)은 모세가 등장하기까지는 야훼의 이름을 피하고 족장들의 신을 단순히 하느님(Elohim)이라고만 말하고 있다. 즉 성경의 모든 기사들은 족장들이 여러 가지 이름으로 하느님을 예배했다는 점을 전하고 있다.(전능의 하느님:El shaddai(탈출 6,3; 창세 17,1; 43,14),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El ‘Elyon(창세 14,18-24), 영생의 하느님:El ‘Olam(창세 21,33), 감찰하시는 하느님:El Ro'i(창세 16,13), 야훼 이레:Yahweh Yir’eh(창세 22,14), 벧엘의 하느님:El Bethel(창세 31,13; 35,7)) 창세기 설화의 족장들은 자유롭고 개인적인 선택에 의해 자신의 하느님을 예배하며 자신을 그 하느님에게 의탁한 것으로 표사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elohe ‘abraham(창세 28,13; 31,42.53), 이사악의 경외하는 이: pahad yishaq(창세 31,42.53), 야곱의 전능자: ‘abir ya‘qob(창세 49,24). 이렇듯 그들의 하느님은 씨족의 수호신이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아람인과 아랍인 사회와 갑바도기아 문서, 족장시대 및 그 이후의 다른 문헌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사점들은 씨족의 우두머리와 씨족의 신 사이에 개약적 관계를 맺는 것이 셈 족 유목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오래된 관습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즉 사람이나 신을 나타내는 다른 이름들도 마찬가지로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이런 이름들은 히브리 선조들이 엘(El)이라는 하느님을 섬겼다는 것을 입증해준다.(이스마엘:Ishmael, (하느님)은 들어주소서; 야곱-:Jacob-el, (하느님)은 보호하소서; 엘 샤다이:El Shaddai; 엘 엘욘:El ‘Elyon; 엘 올람:El ‘Olam; 엘 로이:El Roo’i 등이 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옛 문헌들에서 신의 호칭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으로 보아 분명 그 이름들은 이스라엘 형성 전부터 있었다. 히브리 선조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옮겨 왔을 때 그들의 씨족신들은 공통적인 특징으로 인하여 이런 이름들로 숭배되었던 엘과 동일시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족장들의 신은 결코 단순한지방 수호신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이름들은 고귀하며 그 권능이 영원하며 또한 자기 백성의 일들을 감찰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어떠한 체험을 통하여 조상들의 제의들을 거부하고 새로운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 낯선 땅으로 떠나갔는지는 알 수 없다. 경제적 요인을 간과할 수 없겠지만, 족장들의 종교의 개인적 성격으로 비추어 볼 때, 종교적 체험이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래서 족장들의 종교는 씨족을 수호신으로 여겼던 일종의 씨족 종교였다. 이러한 종교를 유일신교(monotheism)라 할 수 없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공식적인 다신교나 가나안의 다산제의와는 다르다. 그들에게서는 광란의 제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다산 제의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과 같은 소박한 유목민들의 비위에 맞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유산에는 부족의 연대감, 즉 백성과 하느님의 연대감이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걸쳐 강력한 민족 의식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그들은 아브라함 이후 팔레스타인에 정착하여 지방의 성소에서 거행되게 된 조상 전래의 제의들은큰 위세를 얻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스라엘의 한 부분이 된 다른 족속들은 반 유목 생활을계속했으며, 또 다른 족속들 중 후대의 이스라엘의 핵심을 이룬 족속들은 이집트로 들어갔다. 아직까지 그들의 종교 유형에 내재해 있던 약속은 성취되지 않고 남아있었다.

 

3장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이스라엘의 구성원들은 B.C. 2000년대 전반기, 또는 그 이전에 등장했지만 민족을 이루게 된 것은 더 후대였다. 성경은 야곱의 자손들이 이집트로 내려가서 오랫동안 정착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시나이 산으로 가서 그들을 독특한 민족으로 만든 언약과 율법을 받은 경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후 그들은 유랑 끝에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 그 땅을 점령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약 B.C. 13세기 말에 끝났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그 땅에 정착했고, 여러 세기에 걸쳐 그들의 땅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민족이 형성되기까지의 과정에 있어서 후기 청동기 시대(B.C. 1550-1200년경)를 거쳐 갔던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 이집트 탈출, 가나안 정복에 관련된 시대적 배경을 먼저 살펴보자.

후기 청동기 시대의 이집트는 제 18왕조 파라오에 의해 세워졌다. 이 왕조는 힉소스 족을 이집트에서 추방했고 그 후 250여 년 동안 (B.C. 1552-1306) 세력을 잡고 역사적으로 유레가 없는 막강한 국력과 위세를 떨쳤다. 파라오들 중 가장 유능한 전술가였던 투트모세 3(B.C. 1507-1436년경)는 주로 힉소스 족의 잔존자 등을 치기 위하여 열 두 차례 이상 출정했다. 마침내 투트모세 3세는 힉소스 족을 궤멸시켰는데 이 때에 이집트 제국은 북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오론테스 강 어귀에 이르는 곳까지, 남으로는 누비아에 있는 나일강 제4폭포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이집트 제국은 B.C. 14세기까지 그대로 유지되다가 혁명이 일어났다. 아메노피스 4(Amenophis IV, Akhenaten)는 아메노피스 3세와 왕비 테예(Teye)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다. 이 젊은 왕은 아텐(Aten: 태양신 제의)의 옹호자였다. 그는 아텐을 유일한 신이라고 선언하고, 그 신을 기리기 위하여 자신의 이름을 아크나텐으로 바꾸었다. 비록 유일신적 경향들이 B.C. 2000년경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태양신 제의는 모세보다 거의 1세기 전에 이미 이집트에서 유일신적인 성격을 띤 종교가 출현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크나텐의 개혁은 그의 사망과 더불어 사라지고 제19왕조의 창건가인 세토스 1(B.C. 1305-1290년경)가 재위했다. 그 후 마르닙타의 재위 제 5(B.C. 1220년경)에 세워진 석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마르닙타는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에서 정복사업을 수행했다. 그는 거기서 격파한 적들의 목록에 이스라엘 민족도 들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명문 중에서 이스라엘을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것으로서 이스라엘이 그 당시에 땅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연대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고 불린 이 부족 집단이 모세 시대 이전에 팔레스타인에 존재했을 때의 가능성을 받아들일 때에 국한된다. B.C. 1200년경 제 19왕조는 멸망하고 이 혼란기를 틈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등장하기 전의 가나안에는 여러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가나안인은 이 지방 주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서북 셈 족을 가리키는 명칭이었을 것이고, 아모리 족은 서부인을 뜻하는 아카드어로서 족장시대나 그 이전에 상부 메소포타미아와 수리아의 서북 셈 족계의 여러 민족들을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성경에서 열거하고 있는 민족들을 예로 들자면, 헷 족, 히위족, 호리족, 여부스족, 가르가스족, 브리스족 등이 있다.

가나안 인들은 통상을 잘하며, 목재를 수출하고, 직물공업과 염색공업의 선도자였다. 그러나 가나안의 최고의 업적은 물질 문명이 아니라 문자에 있다. B.C. 3000년대가 끝나기 전에 비블로스의 가나안인들은 이집트어를 본뜬 음절 문자를 개발했다. 가나안의 신화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바알의 죽음과 부활인데 이는 일년 주기의 자연계의 힘이 생성과 활동으로 생식력이 확보된다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제의들을 비롯한 수많은 퇴폐적인 관습들이 성행하였다.

가나안은 군소 국가들이 섞여 있었고 규모가 큰 국가는 없었다. 에돔족과 모압 족이 있었는데, 에돔족은 사해 남쪽 끝과 아카바 만 사이, 아라바의 동쪽에 자리를 잡았다. 세 번째 민족인 암몬 족은 더 늦게 출현했지만 판관 시대에 와서는 그 땅에 정착하고 있었다. B.C. 13세기 동안에 요르단 동펀에 아모리족의 두 국가가 건설되었다(민수 21,21.35). 그중 하나는 헤스본을 중심으로 남부 길르앗의 많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고, 또 다른 나라는 바산의 야르묵 강의 원류를 따라 자리잡고 있었던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탈출하였다는 것은 확실한 듯 하다. 이집트의 기록에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있었는지 기록하지 않지만 성경의 전승이 이를 믿는데 증언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 전승에는 어떤 민족이 창안해 낼 수 있는 영웅 서사시 같은 것이라고는 없고, 오직 하느님의 권능만이 구원해 줄 수 있었던 수치스러운 종살이에 관한 회상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는 초기 이스라엘, 특히 레위 지파에 널리 퍼져있던 이집트식 이름들은 이집트와의 관련성을 알려준다. 모세, 흡니, 비느하스, 므라리, 아론 등의 이름이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B.C. 15세기 이후 수많은 문헌들은 이집트에서의 아피루의 존재를 입중해 준다. 아피루는 아메노피스 2세 때(B.C. 1438-1412년경) 이집트에 포로로 잡혀 왔고, 19왕조와 제20왕조의 문서에서 국가 노예로 여러 번 등장한다. 그들 가운데 후대의 이스라엘의 구성원들이 있었음을 의심할 수 없다.

이집트 탈출에 관련해서는 성경 이외의 증거는 없다. 이집트의 기록에 이 내용이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의 실패를 기록하는 파라오가 없었을 뿐 아니라, 한 무리의 노예들이 탈출한 사건은 그들에게 극히 사소한 일이었을 것이다. 로마황제의 연대기에서 예수님의 수난 주간에 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처럼 이집트의 연대기에서 출애굽에 관한 기사를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 자체의 증언이 너무 인상적이기 때문에 그런 눈에 띄는 구원 사건이 일어났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탈출을 이스라엘을 하나의 민족으로 탄생시킨 창시적 사건으로 보았다. 이스라엘의 가장 초기의 옛 시가들(탈출 15,1-8), 오래된 신앙고백 유형의 단편들(신명 6,20-25; 26,5-10; 여호 24,2-13), 성경 시대의 말에 이르기까지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문헌들에 의해 증언되고 있듯이 이집트 탈출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의 초창기부터 신앙의 중심지이며, 오래되고 확고한 것이며 영원히 기억될 엄청난 사건들을 실제로 겪었다는 것 외에는 다른 설명이 불가능하다. 바다를 건너 탈출한 장소는 분명하지 않지만, 성경에서 증언하고 있는 바다(yam sûf)는 홍해가 아니라 갈대바다이다. 즉 홍해에는 갈대가 없다. 갈대바다는 아바리스의 동쪽에 있던 호수-멘잘레(Menzaleh) 호의 하구-였던 것 같으며, 그들이 건넌 바다는 수에즈 운하 연안의 오늘날의 엘 콴타라(El-Qantara)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이집트의 탈출 연대에 있어서는 B.C. 13세기보다 빠르지 않다고 보아도 무난할 것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이 아바리스에서 노역을 했다면 그들은 세토스 1세 시대(B.C. 1305-1290년경)에도 있었음이 틀립없다. 한편 B.C. 13세기 말 팔레스타인의 여러 도시들이 파괴된 것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과 관련된다면, 분명히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은 그보다 한 세대(40, 실제는 25)이전에 일어났을 것이다. 성경 전승에 의하면 탈출부터 솔로몬 제4(B.C. 958년경)까지가 480년이라고 말하고 있다(1열왕 6,1). 이렇게 되면 이집트 탈출시기가 B.C. 15세기로 확정하는 것으로 가나안 정복이 아마르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이 견해는 다른 증거와 조화되기 어렵기에 오늘날 일반적으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40이라는 숫자는 흔히 한 세대를 나타내는 데 사용했으므로 480년도 12세대를 나타내는 수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실제로 한 세대는 대략 25년으로 보면 되듯이 12세대는 480년이 아니라 300년이 되고 그렇게 할 때 이집트 탈출 연대는 B.C. 13세기 중반으로 소급될 것이다.

광야의 유랑생활에 관한 성경에서 언급된 장소들이 거의 전부 확인되지 않는 실정에서 광야의 노정을 재구성하기란 거의 불가능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따르면 그들이 먼저 찾아간 곳은 시나이 산이다. 그러나 시나이 산의 위치는 확실치 않다. 전승에 의하면 시나이 산의 위치는 시나이 반도의 남쪽 끝에 가까운 예벨 무사(Jebel Mûsã)이다. 하지만 성경본문에 의하여 여러 가지 다른 주장들이 제기된다.(탈출기 1916-19에 의거하여 화산의 분출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고 그 인근 화산들이 발견되는 장소인 서북 아라비아(미디안)의 아카바만 동쪽으로 보는 견해; 민수기 1443-451사무엘 157; 278절에 등장하는 아말렉과의 전투 전승(탈출 17,8-16)을 통해 이스라엘이 탈출하여 곧장 가데스로 갔음을 시사한다고 보는 견해; 민수기 1131에서 메추라기 떼가 쏟아진 사건은 이러한 철새가 정기적으로 날아오는 지중해 연안 부근에서 유랑했음을 시사하는 견해; 민수기 332-49와 신명기 12에 의하여 시나이 산이 가데스를 넘어서 상당히 먼 거리에 있었다고 추정하는 견해 등이 있다.) 그럼에도 시나이 산의 위치를 대체적으로 전승에 의한 지점으로 추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왜냐하면 남쪽의 시나이 산으로 가는 길 근처에는 세라빗 엘 카딤(Serãbît el-Khâdnm)이라는 이집트인의 구리광산이 있었다. 이는 겐족이라고 불린(판관 1,16) 모세의 친척들이 이 지역에 살고 있었다는 전승과도 잘 맞는다.

시나이 산이 어느 곳인지 확실치 않지만 모세가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을 받고 이스라엘을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시킨 곳이었음은 의심할 이유가 없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자신들의 역사를 시작하면서 야훼를 예배했다. 팔레스타인을 비롯하여 그 외의 어느 곳에서도 이스라엘의 신앙의 흔적은 없으며, 또한 야훼(Yahweh)라는 하느님의 이름이 그 이전 시대의 문헌들에서 뚜렷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 신앙의 창시자였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야훼가 모세 이전에 예배 되었느냐는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할 문제다. 많은 학자들의 견해는 모세는 장인 이드로에게서 야훼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견해에 지지한다. 탈출기 31에서 이드로는 제사장으로 언급될 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조언을 통해 모세를 도왔고(탈출 18,13-17), 야훼 앞에서 희생제사와 성찬을 주재한 일도 있었다(탈출 18,10-12) 하더라도 이스라엘의 독특한 신앙은 모세로부터 시작되었다. -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의 역사, 엄성욱 옮김, 은성, 2007, 165 참조.) 야훼라고 불린 신이 모세 이전에 예배 된 것이 사실이라 해도, 모세의 활동을 통해 야훼 신앙은 철저하게 변형되고 새로운 내용이 부여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수기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시나이 산을 떠난 뒤 얼마 동안 브엘세바에서 남쪽으로 50마일 가량 되는 지점에 있는 큰 오아시스인 가데스를 거점으로 삼았다. 그런 다음 남부에서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는 데 실패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부로부터 팔레스타인에 침투할 수 없었다는 사실과 에돔과 모압 지역으로 많이 우회했다는 사실은 농경지의 주변들이 남부는 아말렉족을 비롯한 다른 종족들에 의해, 동부는 에돔과 모압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던 기간에 이 집단이 이를 돌파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그 이후 사막에서 유랑생활을 계속하다가 크게 우회하여 요르단 동편으로 나아갔는데, 헤스본(Heshbon)의 아모리족 왕국의 정복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러한 이유로 요르단 동펀에서 행해진 탐사들은 이 지역에서 B.C. 12세기와 그 이후에서야 정착민이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근거를 토대로 한다면 이스라엘이 이 지역에 도달한 연대를 B.C. 1200년대 이후로 잡을 수밖에 없다. 어쨌든 요르단 동편을 통과했다는 전승은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기억에 의거한 것임은 확실하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복에 관한 설화들은 자체적으로 문제를 발생시킨다. 여호수아 1장부터 12장에 의하면 팔레스타인 정복은 이스라엘의 단합된 노력으로 이루어졌고, 불시의 혈전 끝에 완수되었다. 기적적으로 요르단강을 건너고 예리고 성벽을 무너뜨린 후에 세 번의 작전(중부7-9; 남부10; 북부11)을 통해 팔레스타인 전지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또다른 성경 본문에 의하면 또 다른 묘사를 보여 준다. 이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의 점령은 개개 지파들의 노력으로 달성되었으며 그나마 오랜 시간이 걸려 부분적인 성공만을 거두었다(판관 1). 여기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이 실제로는 완벽한 성공과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이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은 팔레스타인을 침공한 것으로 묘사한 성경의 기사는 저자가 역사를 이상화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실제의 사건들은 이 두 견해가 제시하는 단순화된 묘사보다 훨씬 복잡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는 후기 청동기 시대가 끝나갈 무렵 수많은 성읍들이 실제 이 때에 파괴되었는데, 성경에는 그 중 상당수가 이스라엘의 의해 점령되었다고 되어 있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복이 B.C. 13세기 후반에 일어났다고 보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명백하지 않다는 증거가 몇 군데 거론되는데, 예리고, 아이(Ai)를 제외한 벧엘 그리고 남부 팔레스타인의 여러 지방들 중 드빌, 기럇세벨, 라기스 그리고 갈릴리의 주요도시인 하솔(여호 11,10) 등이 있다. 이러한 도시들의 고고학적 증거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복이 치열했으며 또 B.C. 13세기 후반기에 일어났다고 주장되는 학설을 뒷받침 하는 데 기여해 왔다. 그렇지만 이 견해에 부합하지 않는 다른 증거들이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예리고와 아이 성 외에도 기브온, 헤브론(여호 10,36), 아랏, 호르마, 드빌 등은 청동기 시대에 성경이 전하는 바와는 달리 보잘 것 없는 지역이거나 그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지역이거나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지역으로서 파괴당한 흔적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복은 오랜 세월에 걸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정복은 멀리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족장들의 이주로부터 시작되었고,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야 최종적으로 완결되었다. 팔레스타인 정복의 본격적인 단계의 정확한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B.C. 13세기로 추정하는 설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B.C. 12세기로 추정하는 설이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후기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바뀌는 시기인 B.C. 1200년 직후에 일어났고, 평화로운 침투가 아니라 격렬한 전투와 대규모의 정치, 사회, 경제적 동요를 수반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의 복잡성은 고고학적 증거가 아니더라도 성경 전승으로도 복잡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민수기 146절과 2651절에서 이집트 탈출 대열에 참여한 이스라엘을 약 60만 명의 장정을 소집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수치를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성경 자체에도 훨씬 작은 집단을 보여준다. 즉 두 명의 산파(탈출 1,15-22)가 이 집단의 필요를 보살필 수 있었고, 단 하룻밤만에 홍해를 건넜으며, 자신보다 많은 적 앞에서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한 민족이 아닌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진 집단(탈출 12,38; 민수 11,4)이었고, 도망친 노예, 아피루, 이집트의 혈통(레위 24,10)이었으며, 모세의 장인은 미디안 족이었고, 네겝의 아말렉족(1사무 15,6), 갈렙(여호 14,13; 판관 1,10-20)과 오드니엘(여호 15,16-19; 판관 1,11-15)은 그나스족(Kenizzite)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도 여러 종족과 합류했고, 그들 중에는 이집트나 시나이 반도에도 없었던 사람들 중 개종자로서 합류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을 시작했으나 아직 완성하지는 못한 것은 분명하다. 이스라엘은 해안 평야, 에스드렐론 평야를 점령할 수 없었으며, 가나안인들의 거류지들도 산악 지대에 남아 있었다. 특히 예루살렘(판관 1,21)은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야 점령할 수 있었다(2사무 5,6-10). 그리고 비-이스라엘계의 주민들을 체제안에 흡수된 도시는 기브온(여호 9), 므낫세 지파의 부족들인 헤벨, 디르사, 세겜(여호 17,2)이다. 그리고 가나안 정복이 전개되기 전부터 이미 팔레스타인에 있었던 도시는 단지파와 아셀지파(판관 5,17), 즈블론 지파와 이사갈 지파(신명 33,18; 창세 49,13)들이다. 그리고 정착한 후에 세력이 약해지거나 사라진 지파들이 있는데 르우벤, 시므온, 레위지파들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이라 불린 지파 연합이 주전 13세기와 그 이전에 중부 팔레스타인에 이미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호수아서가 중부 팔레스타인의 정복에 관한 설화 기사를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세겜은 12장의 목록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분명 이 지역을 거점으로 차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지파 동맹의 중심지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가나안 정복 후에 야훼 신앙을 채택하면서 집단적으로 이스라엘 지파 동맹에 들어갔다. 또한 가나안 정복과는 별도로 자진해서 들어와 흡수된 경우도 있다. 겐족, 그니스족, 여라무엘족(1사무 27,10; 30,29)이 그러하다. 아무튼 이스라엘은 극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 생겨났다. 그 지파 체계는 여러 가지 출신 배경을 가진 종족들로 메워졌으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여 생활을 시작한 후에야 비로소 표준적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4: 초기 이스라엘 체제와 신앙 지파 동맹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이 어떻게 영토를 확장해 갔는지 앞장에서 살펴보았다. 하지만 고대 세계에서 이스라엘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이 영토를 장악하여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대 세계에서 유행하던 독특한 신앙을 그들만의 역사안으로 흡수 시켰기 때문이었다. 이 종교는 주변 세계에서 특별했고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그들의 위치를 확고히 각인시키는 창조적인 종교로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초기 이스라엘의 체제와 신앙 지파 동맹을 살펴보는 데에 있어서 먼저 신앙을, 그리고 지파체제를, 그리고 지파동맹의 역사를 요약해 보도록 하자.

초기 이스라엘의 신앙은 야훼(Yahweh)였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야훼는 모세에 의하여 인도된 사막에서 예배하던 하느님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신앙을 단순하게 하느님에 국한 시켜 하나의 사상으로 취급하려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야훼 신앙은 그들만의 역사를 통해 받아들여진 총체적 신앙체험으로 응답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지극히 이질적인 혈통을 지닌 종족들로서 주변국들과 같은 막강한 집권체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200여 년 동안이나 한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물론 그것도 야훼 신앙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초기 이스라엘의 체제는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형성된 열두 지파로 보는 것이 전통적이다. 이 지파는 약 200여 년 동안 느슨한 형태를 유지하며 주변국들과는 구별되게 성스러운 전승들과 특색있는 제도들을 토대로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형성시키려 하였다. 지파체제에 관하여 존 브라이트는 마틴 노트(Martin Noth)가 제시한 인보동맹체제 외에 아직까지 별다른 대안을 제시할 수 없음을 인지한다.(인보동맹체제는 야훼 예배를 중심으로 하나로 뭉친 열두 지파의 성스러운 동맹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가설 -같은 책, 209 참조-) 이에 덧붙여 이스라엘의 체제는 첫째 혈통이 아니라 신학적체제 였고, 둘째 공통의 위기감이 아니라 그들만의 통일체 의식이 우선되었으며, 셋째 엄숙한 의식을 통한 대규모 회심을 가져온 위대한 언약이 큰 결속력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지파동맹의 역사는 B.C. 12세기 중엽에서 시작된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난 다음이 되는 시기는 이집트의 붕괴(20왕조: 람세스3)와 함께 한다. 또한 헷 제국은 이미 사라졌고, B.C. 13세기 전성기를 누렸던 아시리아도 쇠퇴했다. 이스라엘은 강대국의 위협에서 자유로이 발전했다. 특히 가나안 땅은 이집트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가나안 점령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의 영토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산악지대(예루살렘), 갈릴레아, 요르단 동쪽과 서쪽, 중앙의 고원지대는 제각기 고립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중앙 성소의 언약궤가 가지는 결집력보다는 언약 동맹의 정신력이 그들을 분열시키지 않는 요인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지파 동맹이 느슨한 통치 형태를 가지고 그토록 오래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각 지파의 카리스마 통치를 통해서였다. 최초의 판관 오트니엘, 에훗의 모압에 대한 승리, 삼가르의 활약, 드보라와 바락의 승리, 입다와 삼손의 활약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아직까지 그들은 왕정보다 야훼의 선택에 따른 카리스마적 대리자들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데에서 민족적 결속력을 찾고 있었다.

 

5.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예루살렘

최근 다윗성 이야기가 논란에 휩싸인 것은 2005년 에일랏 마자르에 의해 발굴된 다윗궁 유적 때문인데, 이는 성경의 말씀대로 다윗과 솔로몬 왕국의 막강한 왕권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기존명제를 옹호하기 위해 발표한 주장 때문이다. (다윗성은 다윗이 여부스족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곽을 둘러쌓아 그 산성에서 살면서 그곳을 다윗성이라 불렀다. 2사무 5,11에 그 뒤 티로 임금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단과 함께 향백나무와 목수와 석수들을 보내어, 다윗에게 궁을 지어 주게 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윌리엄 올브라이트를 중심으로 형성된 최대주의자들은 성경은 흠잡을 데 없는 원전이다. 특히 이가엘 야딘은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이 개발되기 전인 1950년대에 성경의 1열왕기의 근거로 하조르라는 도시에서 성문을 발굴하여 BC 10세기에 번성했다는 솔로몬 왕의 통치기로 단정하였다.

오늘날 프랭클린과 핑켈슈타인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은 이 성문을 솔로몬 시대의 것으로 보지 않는 반면 아미하이 마자르를 비롯한 다른 학자들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핑켈슈타인이 1995년 논문에서 BC 10세기 세계가 상당히 낙후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학계에서 주목을 받자 최대주의자들은 성경을 근거로 여러 곳에서 발굴 작업을 통하여 고고학적 증거를 찾고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성경을 근거로 단정하는 야딘의 순환논법은 부정한다. 최대주의자들은 성경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보되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고, 최소주의자들에게 다윗과 솔로몬은 단순히 허구의 인물이다.

과거에는 성경을 고고학 지침서로 삼는 일이 흔했지만, 최근에는 그런 방식을 비과학적인 순환논법의 사례로 인식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특히 텔아비브 대학교의 이스라엘 핑켈슈타인 교수는 성경에 근거한 가설들을 뒤엎는 데 일가견이 있다. 그를 포함해 늦은 연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인근 지역에서 나온 대부분의 고고학적 증거에 비해 성서학자들이 제시한 연대들이 100년 정도 앞섰다고 말한다. 핑켈슈타인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성서고고학자들이 하조르(하솔), 게제르(게셀), 메기도 등지에서 발굴한 소위 솔로몬의 건물들이 사실 다윗과 솔로몬 통치기에 건설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한참 지난 BC 9세기의 오므리 왕조 때 건설됐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핑켈슈타인에 의하면, 다윗 시대의 예루살렘은 볼품없는 산골마을에 불과했고, 다윗도 초라한 인물이었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엄청난 전차 군단이 아니라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지금의 학계에서는 핑켈슈타인의 이론을 성경 최대주의자와 성경 최소주의자 간의 절충안으로 받아들이는 실정이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은 사실일지라도 600여년의 긴 안목으로 투영되어 편찬된 성경내용인 만큼 후대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 때문이다. 즉 다윗은 BC 10세기에 살았던 실존 인물로서 이스라엘의 정착촌에서 집단의 지도자로는 인정하지만 황금도시 예루살렘의 왕이나, 솔로몬 시대의 거대한 제국 같은 것은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야기가 집필되던 600년 후대에 그들이 당시 직접 목격한 현실의 투영이 집필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 나에게 있어서 다윗은 비록 변방의 흩어진 무리를 모아 위로와 힘을 준 것 밖에 없을지라도, 큰 민족의 뿌리로서 그 역할을 다한 역사의 중요한 인물로 다가온다.(다윗과 솔로몬, 로버트 드레이퍼, 내셔널 지오그래픽, (2010/12), 2-27 참조.)

 

6:독립왕국 이스라엘과 유다 - 7:아시리아의 정복시대

솔로몬의 사망(B.C. 922) 후 다윗체제는 무너지고 두 왕국으로 갈라졌다. 북부 이스라엘은 200년간 지속되다가 B.C. 722년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했고, 남 유다는 335년간 지속되다가 B.C. 587년 바빌론에 의해 함락되었다. 하지만 남 유다의 멸망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고 이번 두 장에서는 팔레스타인 주변 정세의 변화에 따라 두 왕국이 어떻게 야훼신앙과 국가수호라는 대업을 유지해 가는 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스라엘과 유다가 갈라지게 된 이유는 많겠지만 먼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북 이스라엘을 관대하게 포옹하지 못한데서 찾을 수 있다. 북부 지파들은 옛 전통을 고수하면서 카리스마적 지도력에 의해 나라가 다스려지기를 원했다. 다른 한편 르호보암을 왕으로 묵인해주는 대가로 솔로몬왕조에 의해 분담되었던 무거운 강제노역을 완화시켜 달라고 청하는 이스라엘의 대표들의 협상을 묵살한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유다 왕조는 동질적 전통과 제의로 안정되어 있었지만, 북 이스라엘 사람들의 절반 정도는 야훼신앙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가나안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은 비교적 영토가 넓고 비옥하여 외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환경도 이 왕조를 50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전복되게 하는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분열은 가속화되어 북동쪽에서 아람족 영토를 상실했고, 동쪽에서는 암몬이 독립했고, 모압은 유다로부터 독립했고, 에돔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이즈음에 이집트에는 제21왕조 시삭(Shishak)이 일어섰는데, 카르낙(Karnak)에서 발굴된 비문에는 팔레스타인지역을 포함하여 150개 이상의 점령지를 기록하여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와 이스라엘은 각각 번영하여 솔로몬시대에 버금가는 영토를 찾았고 평화를 누리기도 했다. 솔로몬의 외교정책을 답습한 북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의 새로운 수도인 사마리아에 세워진 상아궁(1열왕 22,39)이 그들의 번영을 확인해 준다. 그러나 그 주된 이유는 주변국들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누리는 사치였다. 북 이스라엘에는 부정부패와 빈부격차가 심했고, 이교와 다산제의로 종교적 타락에 젖어있었다. 이에 아모스와 호세아가 등장하여 모범을 제시했다. 남 유다에서는 북 이스라엘보다 빈부의 격차가 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다에는 부유층이 오히려 이스라엘보다 많았다.

한편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아시리아의 세력확장에 반기를 든 아람-이스라엘 연합군은 유다의 가담을 요구하며 예루살렘을 봉쇄하였다. 하지만 유다는 저항하며 아시리아에 많은 선물을 보내며 도움을 청하였다. 아시리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공격(2열왕 15,29)하여 사마리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도시들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상부메소포타미아와 메디아로 이주시키고 바빌론과 하맛지방(2열왕 17,24) 사람들을 정착시켰다.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후 유다의 존립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으나 쉽게 꺼지지 않았다. 아시리아 앞에 무릎을 꿇었기에 그 등불은 곧 일어서게 될 바빌론에게 넘어갔다.

이렇게 존 브라이트에 의해 제기된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왕국의 흥망성쇠는 부분적으로 성경본문에 많은 무게를 실었다는 점에서 신학적 도움이 크지만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다. 학계를 통해서 좀 더 많은 역사적 사료들을 찾아 낼 수 있기를 바란다.

 

8: 유다 왕국: 마지막 세기

예루살렘의 멸망은 히즈키야가 죽은 뒤 한 세기(B.C. 687-587)만에 일어났다. 이에 관해서 바빌론의 연대기를 비롯하여 예레미야, 에제키엘, 스바니야, 나훔, 하바쿡을 참고하고 2열왕(21-25); 2역대(33-36)에서 많은 자료를 제공받아 비교적 상세히 기술한 존 브라이트의 견해를 참조, 요약하면서 살펴보도록 하자.

히즈키야가 죽고 그의 아들 므낫세가 어린 소년으로 왕위를 오르던 시기는 아시리아의 팽창이 절정에 이를 때였다. 아시리아는 바빌론을 비롯하여 이집트까지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빌론에 거주하던 갈대아인들(아람인), 북부지역에서는 서부 이란에 정착해 온 메대인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수리아 사람들과 아랍 부족이 끊임없이 아시리아 세력에 도전했다. 아시리아 제국은 격렬한 접전으로 이들을 제압했고, 엘람과 바빌론에서 추방시킨 사람들을 사마리아와 그 밖의 서부 지역에 정착시켰다(스바 4,9). 하지만 내분으로 아시리아의 지배권은 급속히 약화되었고 결국 바빌론 군과 그 동맹군이 하란을 점령하여 아시리아는 멸망했다. 이 시기에 유다는 요시아(B.C. 640-609)가 통치하게 되었는데 괄목할 만한 것은 종교개혁의 단행이다. 이 개혁은 성전을 수리하는 중에 발견된 율법서를 읽고 난 뒤 시작되었는데 성전정화를 비롯하여, 이방 제의와 관습을 숙청하고, 북부 이스라엘로 진출하여 사마리아의 신당들과 벧엘 성전을 파괴하고, 모든 지방의 제사장들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여 공적인 예배를 예루살렘으로 집중시켰다.

요시아가 단행한 종교개혁은 통상적으로 민족주의로 축약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에 관해서 존 브라이트의 견해는 당시 세계는 또 다른 전쟁을 기다리는 불안한 분위기 휩싸여 옛 문헌들을 숙고하고 연구하는 작업들로 예전의 태평성대를 동경했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발견된 율법서는 이집트와 아시리아에서 성행했던 옛 문화 복원과 문헌의 수집과 기록의 풍조에 유다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진술한다.

요시아 말년에 바빌론 인들과 메데인들이 아시리아의 니느웨를 점령하고 하란을 놓고 아시리아-이집트 동맹군과 바빌론-메데인들과의 접전이 벌어지자 요시아는 이집트의 느고 2세에 반대하여 이를 저지하였다가 전사한다. 메소포타미아가 완전히 바빌론에 들어가자 이집트도 경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집트의 느고는 아시리아를 구하지 못했지만 팔레스티나와 시리아를 장악했다. 유다는 이집트를 섬기는 여호야킴이 왕위에 오르자 요시아의 종교개혁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신명기의 요구에 순명했는데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요시아의 처참한 죽음과 민족의 굴욕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은 신명기 신학을 부정하는 징조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여호야킴은 이집트와 바빌론 사이에서 갈등했다. 먼저는 바빌론 편에, 그리고 얼마 후에는 이집트 편에 섰다. 유다는 바빌론에 B.C. 597년 항복했고, 왕과 모후, 고관들, 지도층 인사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그 후 10년간(B.C. 597-587) 시드키아가 임명되었는데 바빌론으로 끌려간 이들이 돌아 오리라며 최후의 반란이 일어나자 바빌론은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B.C. 5877월에 예루살렘 도성은 함락되었고, 그들의 오래된 희망의 신학에도 불구하고 야훼신앙은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존브라이트는 왕도 없고, 도성도 없고, 땅도 없는 이스라엘의 종말은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을 부여받은 새롭고 변화된 백성들이 부여받을 희망으로 눈길을 돌린다.

 

9: 포로생활과 귀환 - 10:BC 5세기의 유대인 공동체

예레미야서 5228-30절에는 세 차례(B.C. 597, 587, 582)에 걸쳐 이스라엘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것을 회고하는데, 바빌론 유배는 멸망한 이스라엘 역사의 커다란 분수령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의 역사는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유배생활은 그들에게 야훼신앙을 더욱 확고히 심어주었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귀환하여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자 하는 원의를 통해서 유대교(Judaism)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존 브라이트의 견해를 따라가며 이스라엘의 유배생활과 귀환, 그리고 성전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 역사의 분수령을 넘어서 다가오는 시대의 미래를 확보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느부가넷살에 의해 파괴된 성전은 오랫동안 재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유다의 몰락(B.C. 587)에도 불구하고 북부 이스라엘의 옛 영토는 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유다인들의 눈에는 불공평해 보였다. 이스라엘을 덮친 엄청난 재앙을 상기해 볼 때 다른 군소 국가들의 몰락에 비해 그들만의 민족적 주체성은 영원히 상실하지 않았다. 가혹한 시련에도 이스라엘의 신앙은 놀라울 만큼 힘과 활력을 보였다. 왜냐하면 국가와 제의가 망한 지금 그들이 유대인임을 나타낼 수 있는 표식이 전통과 율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유배 중인 이스라엘의 소망은 고국으로의 귀환이었다. 폐허가 된 거룩한 도성을 상기하며 다시 한 번 이집트를 탈출할 때처럼 고국으로 돌아갈 해방의 날을 기다리며 야훼의 종의 노래를 불렀다.

고레스의 등장(B.C. 538)으로 이스라엘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2 이사야가 외쳤던 바 유대인들은 시온으로 몰려들지도 않았고 열강의 왕들이 회심하여 야훼를 예배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기존에 머물던 사람들과의 반감이 고조되어 모든 것이 불안하고 위태로웠다. 성전의 재건축에 있어서 우려되는 점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들여서 건축되지 않고 페르시아 왕실의 후원에 애착했기에 성전에 대하여 아무런 충성심도 보이지 않자 유대인 공동체는 실의에 빠졌다. 오히려 사마리아의 귀족들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요세화하여 폭동을 일으키려한다고 페르시아 당국에 고발하여 공사를 방해했다. 이제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각자의 처소에서 그대로 지내기를 원했다. 유대인 공동체는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페르시아 제국의 여러 지역, 이집트 지역에서도 정착하여 엘레판틴 식민지 공동체로 잘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르시아 제국 아닥사스다의 궁정에는 느헤미야라는 유대인이 있었다. 그는 하나냐의 안내를 받아 예루살렘의 상황을 안내받았고 궁으로 돌아가 공식적인 성전재건의 칙령을 받아서 유다에 도착(B.C. 440)했다. 느헤미야는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전 재건에 성공하여 백성의 일부를 예루살렘으로 입주시켰다. 종교개혁의 단행을 갈망하던 느헤미야의 재직기간 말기(B.C. 433, 또는 428)에 율법학자인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등장한다.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생활을 정상화하는 특수 사명을 띠고 페르시아 왕의 칙령을 지니고 와서 느헤미야가 구축한 행정적 안정의 틀에서 율법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법(율법)에 따라 내정문제를 규율하는 유대인 공동체를 재조직하였다.

결론적으로 바빌론의 유배와 귀환, 그리고 성전 재건을 통해서 흩어진 이스라엘을 모아들여서 율법 공동체를 구현 하는데 인간적 노력과 신적 노력이 모두 필요한 것 같다.

 

11: 구약시대의 말기 - 12장 구약시대 말기의 유대교

구약시대의 끝을 향하여 가는 동안 이스라엘의 역사는 공백기에 접어든다. 물론 마카베오기에 가서는 다시 재개된다. 그럼 존 브라이트의 견해를 따라 이번 장과 다음 장을 통해서 페르시아의 몰락과 헬레니즘이 시작하는 변화 속에서 구약시대의 말기에 도달한 이스라엘의 상황과 유다교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자.

페르시아 시대 말기에 이르면 유대인들의 행적을 거의 알 수 없을 정도로 전반적인 자료가 희박하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불화가 극에 달했던 것은 B.C. 2세기 말로 본다. 그러나 상호간의 적대적 알력의 역사는 스룹바벨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느헤미야 때 정치적 독립에 이어 에즈라의 종교적 분리의 단행은 터를 잡고 있던 사마리아인들의 증오를 샀다. 특히 사마리아인들은 오경을 모세의 율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에즈라, 느헤미야와 같은 극단적 유대인들은 그들을 무시하고 이방인이나 적으로 여겼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사마리아들은 그들대로 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된 유다의 남은자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예루살렘이 하느님을 합법적으로 예배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는 것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이즈음 해서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짐산에 그들의 성전을 세우고, 세켐을 재건하여 그들만의 종교적, 문화적 중심지로 만들었다.

유배기 이전에 이미 히브리어의 서체는 아람어의 영향을 받았는데, 페르시아 말기에 이르러 그리스 문화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불가피하게 유대인들은 그리스 정신과 접촉하였는데, 이스라엘 신앙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특히 B.C. 3세기에 대표적으로 칠십인역(Septuagint)을 통하여 유대인들의 정신에 그리스 사상이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했고, 그리스도교가 세계 각지로 전파되는 길을 닦아 놓았다. 알렉산더 대왕(B.C. 336-323)의 출현으로 페르시아의 전지역은 그리스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예루살렘도 도시 국가(polis) 형태로 간주되었다. 또한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B.C. 175-163)는 유대인 종교문제에 간섭했는데 돈을 많이 내어놓는 자에게 대제사장의 자리를 주었다.

마카베오 1,2서와 다니엘서에서 볼 수 있듯이 유대인들의 저항이 안티오쿠스로 하여금 최후의 가혹한 조치를 취하게 했다. 그는 유대인들의 이러한 비타협적인 태도가 종교 때문임을 알고 그의 부왕이 허용한 종교적 특혜들을 폐지하고 유대교 관습을 금하는 칙령을 공포했다. 정기적인 희생제사, 안식일과 전통적 절기, 율법의 사본, 어린이 할례 등 이모든 것들 중에 하나라도 어기면 사형에 처했다. 또한 이교 제단들을 세우고 부정한 짐승들을 제물로 바쳤다. 이러한 정책의 절정으로 B.C. 16712월에 올림푸스 제우스 신을 위한 제의가 예루살렘 성전에 도입되었다. 다니엘서(B.C. 166-5)의 저자는 안티오쿠스 박해 때에 경건한 하시딤 이었는데, 그가 기술한 느부가넷살의 모습 배후에 안티오쿠스의 모습을 채색했다. 이러한 이교적 만행에 항거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유다는 숫적으로 열세였지만 대승을 거두고 한동안 종교적 자유와 정치적 자치권을 누렸다. 구약시대 말기에 와서 유대인 공동체가 유대교라는 종교의 확고한 틀을 형성한 것은 에즈라의 공로였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은 유배를 통해서 율법을 강화시켰고, 율법 강화를 통해서 유대교를 형성시켰다. 유대교의 발전은 율법의 절대화를 가져왔고 거룩한 백성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거룩한 백성은 하느님을 직접 부를 수도, 다가갈 수 없고, 다만 천사들과 중간적 존재를 개입시켰다. 그리하여 구약시대 말기에 와서 유대교의 종말론은 묵시(계시)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역사와 신앙-(1)

-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명기계적 사관에 따른 나의 견해 -

이스라엘의 역사는 고대 오리엔트 역사의 무대 주변에 초대되었다. 그 무대에서는 매일 잔치가 벌어졌고, 풍악을 울렸으며, 하늘을 향해 노래를 불렀다. 그러한 잔치 무대에서 이스라엘은 늘 소외되었으며, 고통 받았고, 억압당했으며, 배고팠다. 그들의 비참한 처지를 잔치 술에 취한 강국의 주역들은 알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의 역사를 기술하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역사는 성경 안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아브라함으로부터 야곱에 이르는 시기 (B.C. 2000-1550)를 시작으로 모세(B.C. 1280년경), 판관들(B.C. 1250년경부터), 다윗과 솔로몬(B.C. 1000년경부터), 요시아(B.C. 640년경부터), 느헤미아와 에즈라(B.C. 445년경부터), 마카베오(B.C. 166)로 이어진다.

물론 이스라엘의 기원시대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류의 문화가 발생하고 발달해 왔다고 보는 것이 역사 고고학적 입장이며 동시에 성경을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부분에서 역사 고고학적 입장은 성경과 다른 양상을 띠게 되는데,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과 다윗성에 관련된 입장이 그것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에 있어서 성경이 진술하는 바는 야곱의 자손들이 이집트로 내려가서 오랫동안 정착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시나이 산으로 가서 언약과 율법을 받고, 그들을 독특한 민족으로 만들었고, 이어서 가나안 땅을 쳐들어가 일사불란하게 정복하였다고 전하는 반면, 역사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이집트 마르닙타의 재위 제 5(B.C. 1220년경)에 마르닙타는 팔레스티나에서 정복사업을 수행하고 석비를 세웠는데, 이것은 당시의 명문 중에서 이스라엘을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것으로서 이스라엘이 당시에 그 땅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고 밝힌다. 이에 관하여 존 브라이트는 마틴 노트(Martin Noth)가 제시한 인보동맹체제를 소개하는데, 그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체제는 첫째 혈통이 아니라 신학적 체제였고, 둘째 공통의 위기감이 아니라 그들만의 통일체 의식이 우선되었으며, 셋째 엄숙한 의식을 통한 대규모 회심을 가져온 위대한 언약이 큰 결속력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왕정보다 야훼의 선택에 따른 카리스마적 대리자들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데에서 민족적 결속력을 찾았다고 진술한다.

두 번째는 다윗성에 관련된 역사 고고학적 입장과 성경의 진술의 논쟁이 팽배이 맞서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2사무 5,11에 티로 임금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단과 함께 향백나무와 목수와 석수들을 보내어, 다윗에게 궁을 지어 주게 하였다. 이에 관하여 핑켈슈타인은 다윗은 이스라엘의 정착촌에서 BC 10세기에 살았던 실존 인물로서 인정하지만 황금도시 예루살렘의 왕이나, 솔로몬 시대의 거대한 제국 같은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과 인근 지역에서 나온 대부분의 고고학적 증거에 비해 성서학자들이 제시한 연대들이 100년 정도 앞섰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핑켈슈타인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성서고고학자들이 하조르(하솔), 게제르(게셀), 메기도 등지에서 발굴한 소위 솔로몬의 건물들이 사실 다윗과 솔로몬 통치기에 건설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 100년이 지난 BC 9세기의 오므리 왕조 때 건설됐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핑켈슈타인은 다윗 시대의 예루살렘은 볼품없는 산골마을에 불과했고, 다윗도 초라한 인물이었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엄청난 전차 군단이 아니라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성경이 집필되던 600년 후대(바빌론 유배)에 그들이 당시 직접 목격한 현실이 투영되어 집필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았다.

이리하여 현대의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놓고 두 부류로 갈라섰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대부분 사실로 받아들이는 막시말리스트적 관점과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후대에 저술가에 의해 부풀려졌다는 미니말리스트적 관점이다. 막시말리스트적 관점은 텍스트 이전의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까지 폭넓게 받아들이지만, 미니말리스트적 관점은 성경내용에 귀착하기보다 주변 강대국의 역사에 중점을 두고 성경의 기록은 단편적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두 노선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두 노선이라 생각한다.

역사 고고학적 발굴과 성경본문을 통해서 공통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는 성경에서 기술하고 있듯이 그렇게 대단하거나 화려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주역국들에 비하면 팔레스티나는 성경 전승에서 말하듯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지역으로 느껴진다. 어떤 면에서는 마을과 무덤이 거리가 먼 것처럼 예루살렘은 주변 열강들이 가까이 하기를 꺼려하는 곳에 외로이 정착한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한 맥락에서 돌이켜 보자면 예루살렘은 인류 문명 발상지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은신처로 적절한 장소라는 인상이 짖다. 하지만 신앙에 있어서만큼은 남달랐다. 이스라엘은 현실을 이상화시킬 줄 아는 민족이었다. 자연적 흉상물이나 인간적 상징물을 만들어 숭배하는 역사적 무대는 세월에 따라, 혹은 주역의 취향에 따라 변하고 사라졌지만,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는 시대와 장소가 바뀌어도 늘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았으며, 그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신명기계적 사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신앙의 기원은 예언자로서 모세의 역할과 사제로서 아론의 역할에서부터 뿌리내렸다고 볼 수 있다.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체험하게 된 신앙은 목적지향적 방황의 종결의 의미로 이해되었으며, 그것은 그들의 선조 아브라함으로부터 받아낸 약속이 실현 되리라는 희망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 줄곧 이어져 왔다. 그러한 이념과 장소의 확립은 여러 예언자 엘리, 사무엘, 나탄, 엘리야, 엘리사를 통해서도 계속해서 주지되었다. 예언자들에 의해 주창된 신명기정신에 입각한 하느님 사랑인간 사랑은 그 후로도 그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으며, 그들의 역사 안에서 계속되는 종살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신명기계적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정제도 안에서 사제들에 의해 행해졌던 우상숭배는 예언자들을 광야로 내몰았으나, 에즈라에 와서는 예언적 소명과 사제적 소명이 통합되는 모습을 취하게 된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신명기계적 사관에 의하면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이념과 장소는 끊임없이 도전받았다. 그 곳은 권력과 세력의 관심을 뒤로한 야훼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서 보다는 미래에 다가올 세상을 동경하도록 부추기는 거룩한 성소였으며, 야훼 신앙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하는 거룩한 장소적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만의 신학으로 야훼신앙을 승화시켜 특별한 위로를 받는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신명기계 역사 안에서 제시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신앙은 유배를 통해서 율법을 체계화시켰고, 율법의 확립을 통해서 유대교를 형성시켰다. 이렇게 신명기계 역사기술을 통한 야훼 신학의 발전은 유대교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유대교의 발전은 율법의 절대화를 가져왔고, 거룩한 백성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원의를 발생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 실현은 하느님과 인간을 격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신명기계적 정신에 비춰본다면 그들의 처지가 형편없이 몰락하는 것은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며, 그러한 그들은 상선벌악에 의해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신명기의 정식에 고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명기의 정신은 율법주의를 낳았으며, 이로써 거룩한 선민을 구원의 딜레마에 빠지게 하였다. 그들 스스로는 율법 앞에서 아무 것도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고, 이어서 천사들과 같은 중간적 존재의 개입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구약시대 말기에 와서 유대교의 종말론은 묵시(계시)의 형태로 드러나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역사의 무대에 초대되었다가 쫓겨나서 종살이를 면하기 어려웠을 때에도 야훼는 그들을 눈여겨 보아주었고, 유배지에서 그들의 소리를 귀여겨 들어주었다. 그래서 옛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유배지에서의 서러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쫓겨났던 무대 주변에 다시 한 번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곳에서 너무 하느님을 경외한 나머지 자구책으로 이스라엘의 신앙은 극에 달아 오직 율법만을 맹신하게 되었다. 율법으로 모든 인간을 속물로 만들고 죄인으로 추락시켰다. 하느님을 봐서도 안 되고 심지어 이름도 부르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그들의 선조 아브라함과 다정했던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앙을 통해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어려운 시련이 닥쳐도 극복할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죽음이 내 앞에서 도사리고 있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그 죽음의 독을 생명의 단꿀로 바꿀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아니 이미 주셨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종합하면서 역사적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이스라엘의 신앙에 있어서 신명기계적 사관에 따른 나의 견해는 막시말리스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125절에 밝히고 있듯이 기록되었다가 사라졌거나 애당초 기록되지 않은 역사가 기록된 역사보다 많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역사와 신앙-(2)

-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명기계적 사관에 따른 야훼신앙 발달 과정 숙고 -

이스라엘의 역사는 고대 오리엔트 역사의 무대 주변에 초대되었다. 그들은 매일 잔치를 벌였고, 풍악을 울렸으며, 하늘을 향해 노래를 불렀다. 그러한 잔치상에서 이스라엘은 늘 소외되었으며, 고통 받았고, 억압당했으며, 배고팠다. 그들의 비참한 처지를 잔치술에 취한 주역들은 알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신앙에 있어서만큼은 남달랐다. 자연적 흉상물이나 인간적 상징물을 만들어 숭배하는 무대는 세월에 따라, 혹은 인간의 취향에 따라 변하고 사라졌지만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는 시대와 장소가 바뀌어도 늘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았으며, 그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잔치무대에서 쫓겨날 때에도 눈여겨 보아주었고, 유배지에서 그들의 소리를 귀여겨 들어주었다. 그래서 옛 선조들을 그리워하며 유배지에서의 서러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쫓겨난 무대 주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하느님을 경외한 나머지 이스라엘의 신앙은 극에 달아 오직 율법만을 맹신하게 되었다. 율법으로 모든 인간을 속물로 만들고 죄인으로 추락시켰다. 하느님을 봐서도 안 되고 심지어 이름도 부르지 못하게 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선조 아브라함과 다정했던 하느님을 엄격하고 난폭하게 바꾸고 말았다.

그러면 그동안 한 장씩 요약을 했던 존 브라이트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토대로 역사와 신앙이라는 큰 무대 주변에 던져진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명기계적 사관에 따른 야훼 신앙의 발달과정에 관하여 간략하게 종합해 보도록 하자.

B.C. 2000년 이전의 인류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는 것은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해 올바른 이해를 가져다 줄 것이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된 판독할 수 있는 명문(銘文)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B.C. 3000년 초, 즉 아브라함 시대보다 약 1000, 모세 시대보다 약 15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고고학적 발굴들은 B.C. 4000, 5000, 6000, 7000, 많은 경우에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련의 문화들을 밝혀냈다. 거기에 비하면 히브리인은 역사상 늦게 등장했다. 성경의 배경이 되는 모든 지역에 걸쳐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문화가 발생하고 발달해 왔다.

이스라엘의 기원시대라 할 수 있는 B.C. 2000년경부터 B.C. 1550년경까지는 성경 전승에서 아브라함 으로부터 시작하여 야곱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조명해주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아브라함은 그에게 보여줄 곳에서 땅과 자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하느님의 명령에 다라 하란을 떠났고(창세 13,1-3), 약속을 거듭 갱신했고(창세 15,5.13-16; 18,18), 언약에 의해 보증되고(창세 15,7-12.17-21), 약속은 이사악(창세 26,2-4)과 야곱(창세 28,13-15; 35,11), 그리고 모세(탈출 3,6-8; 6,2-8)에게도 주어져다. 이렇게 보면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신앙의 선조가 된다. -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의 역사, 엄성욱 옮김, 은성, 2007, 129 참조.)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오게 된 계기가 되는 민족 이동은 수세기에 걸쳐 지속되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언제 이집트로 내려갔느냐고 묻는 것은 문제를 잘못 제기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때에 이스라엘 민족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족장들의 종교의 역사에 관해서 성경은 모세를 이스라엘 종교의 창시자로 보았다. 족장들의 하느님은 야훼(Yahweh)였고, 특히 모세가 등장하기까지는 야훼의 이름을 피하고 족장들의 신을 단순히 하느님(Elohim)이라고만 말했다.

성경은 야곱의 자손들이 이집트로 내려가서 오랫동안 정착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시나이 산으로 가서 그들을 독특한 민족으로 만들었다. 이어서 언약과 율법을 받고 가나안 땅을 쳐들어가 정복하였다. 하지만 마르닙타의 재위 제 5(B.C. 1220년경)에 세워진 석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마르닙타는 팔레스티나에서 정복사업을 수행했다. 이것은 당시의 명문 중에서 이스라엘을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것으로서 이스라엘이 당시에 그 땅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고고학적 증거는 후기 청동기 시대가 끝나갈 무렵 수많은 성읍들이 실제 이때에 파괴되었다고 보고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복은 오랜 세월에 걸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정복은 멀리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족장들의 이주로부터 시작되었고,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야 최종적으로 완결되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은 특별하다. 고대 세계에서 유행하던 독특한 신앙을 그들만의 역사 안에서 개화 시켰기 때문이었다. 초기 이스라엘의 신앙은 야훼(Yahweh)였다. 주변국들과 같은 막강한 집권체제가 없었음에도 한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야훼 신앙에 기인한 카리스마적 통치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존 브라이트는 마틴 노트(Martin Noth)가 제시한 인보동맹체제를 소개한다.(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친 열두 지파의 성스러운 동맹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가설 -존 브라이트, 같은 책, 209 참조-) 그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체제는 첫째 혈통이 아니라 신학적 체제였고, 둘째 공통의 위기감이 아니라 그들만의 통일체 의식이 우선되었으며, 셋째 엄숙한 의식을 통한 대규모 회심을 가져온 위대한 언약이 큰 결속력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왕정보다 야훼의 선택에 따른 카리스마적 대리자들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데에서 민족적 결속력을 찾았다.

이스라엘 민족의 자부심이 극에 달한 것은 다윗 시대라 할 수 있다. 2사무 5,11에 티로 임금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단과 함께 향백나무와 목수와 석수들을 보내어, 다윗에게 궁을 지어 주게 하였다. 이에 관하여 핑켈슈타인은 다윗은 이스라엘의 정착촌에서 BC 10세기에 살았던 실존 인물로서 인정하지만 황금도시 예루살렘의 왕이나, 솔로몬 시대의 거대한 제국 같은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과거에는 성경을 고고학 지침서로 삼는 일이 흔했지만, 최근에는 그런 방식을 비과학적인 순환논법의 사례로 인식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특히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대학교의 핑켈슈타인 교수를 포함해 늦은 연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인근 지역에서 나온 대부분의 고고학적 증거에 비해 성서학자들이 제시한 연대들이 100년 정도 앞섰다고 말한다. 핑켈슈타인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성서고고학자들이 하조르(하솔), 게제르(게셀), 메기도 등지에서 발굴한 소위 솔로몬의 건물들이 사실 다윗과 솔로몬 통치기에 건설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한참 지난 BC 9세기의 오므리 왕조 때 건설됐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핑켈슈타인에 의하면, 다윗 시대의 예루살렘은 볼품없는 산골마을에 불과했고, 다윗도 초라한 인물이었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엄청난 전차 군단이 아니라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 다윗과 솔로몬, 로버트 드레이퍼, 내셔널 지오그래픽, (2010/12), 9-11 참조.) 왜냐하면 이야기가 집필되던 600년 후대(바빌론 유배)에 그들이 당시 직접 목격한 현실의 투영이 집필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본다.

솔로몬의 사망(B.C. 922) 후 다윗체제는 무너지고 두 왕국으로 갈라졌다. 북부 이스라엘은 200년간 지속되다가 B.C. 722년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했고, 남 유다는 335년간 지속되다가 B.C. 587년 바빌론에 의해 함락되었다. 아시리아는 이스라엘을 공격(2열왕 15,29)하여 사마리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도시들을 파괴하고, 그 주민들을 상부메소포타미아와 메디아로 이주시키고, 사마리아에 바빌론과 하맛지방(2열왕 17,24) 사람들을 정착시켰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히즈키야가 죽은 뒤 한 세기(B.C. 687-587)만에 일어났다. 요시아가 단행한 종교개혁은 통상적으로 민족주의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들은 신명기의 요구에 순명했는데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요시아의 처참한 죽음과 민족의 굴욕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은 신명기 신학을 부정하는 징조로 받아들였다. 불길한 징조는 곧 현실로 다가왔다. 바빌론은 B.C. 5877월에 예루살렘 도성을 함락시켰고, 이스라엘의 오래된 야훼 신앙과 희망의 신학에도 불구하고 야훼는 그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듯 했다.

바빌론 유배생활은 그들에게 야훼신앙과 더불어 율법의 정신을 더욱 확고히 심어주었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귀환하여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자 하는 원의를 발생시켰다. 고레스의 등장(B.C. 538)으로 이스라엘은 고국으로 돌아왔고, 느헤미야에 의해 주도된 성전의 재건축은 괄목할 만하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다인들이 자신들을 제쳐두고 페르시아 왕실의 후원에 힘입어 성전을 재건했기에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기존에 머물던 사람들과의 반감이 고조되어 모든 것이 불안하고 위태로웠다. 그리하여 사마리아의 귀족들은 성전 재건 공사를 방해했다. 느헤미야 말기(B.C. 433, 또는 428)에 율법학자인 에즈라는 예루살렘에 등장하여 율법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법(율법)에 따라 내정문제를 규율하는 유대인 공동체를 재조직했다.

구약시대의 끝을 향하여 가는 동안 이스라엘의 신앙은 헬레니즘 영향권에 녹아들었다. 페르시아시대 말기에는 거의 유대인들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전반적인 자료가 희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십인역(Septuagint)은 유대인들과 이방세계에 그리스도교를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렇게 역사적 고고학적 사료로 살펴 볼 때 이스라엘의 역사는 성경에서 기술하고 있듯이 그렇게 대단하거나 화려하지 않음이 밝혀진다. 예나 지금이나 주역국들에 비하면 팔레스티나는 성경 전승에서 말하듯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지역으로 느껴진다. 어떤 면에서는 마을과 무덤이 거리가 먼 것처럼 예루살렘은 주변 열강들이 가까이 하기를 꺼려하는 곳에 외로이 정착한 것뿐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인류 문명 발상지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은신처로 적절한 장소라는 인상이 짖다. 하지만 그 곳은 권력과 세력의 관심을 뒤로한 야훼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서 보다는 미래에 다가올 세상을 동경하도록 부추기는 거룩한 성소였으며, 야훼 신앙의 요람으로 자리매김 했다. 또한 그들만의 신학으로 야훼신앙을 승화시켜 특별한 위로를 받았다. 특히 신명기계 역사 안에서 제시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신앙은 유배를 통해서 율법을 체계화시켰고, 율법의 확립을 통해서 유대교를 형성시켰다.(M. Noth는 여호수아기부터 열왕기 하권까지를 신명기계의 시각으로 적힌 것이라고 보았다. - 염철호, 「신명기계 역사서 입문: 강의록」2011, 9 참조.) 이렇게 신명기계 역사기술을 통한 야훼 신학의 발전은 유대교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유대교의 발전은 율법의 절대화를 가져왔고, 거룩한 백성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원의를 발생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 실현은 하느님과 인간을 격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천사들과 같은 중간적 존재의 개입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구약시대 말기에 와서 유대교의 종말론은 묵시(계시)의 형태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앙을 통해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어려운 시련이 닥쳐도 극복할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죽음이 내 앞에서 도사리고 있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그 죽음의 독침을 생명의 단꿀로 바꿀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주신다. 아니 이미 주셨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앙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