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가해 그리스도왕 대축일 마태25,31-46 (20231126 성남동성당)

jasunthoma 2023. 11. 25. 05:35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연중시기가 끝나고 대림시기를 맞이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께서 세상 끝날 최후의 심판을 하는 날을 기리는 대축일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들과 함께 오시면. . .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임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오면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양은 오른쪽에 염소는 왼쪽에 세우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오른쪽에 있는 양은 프로바타προβατα인데 도축되는 양입니다. 양 우리에 갇혀있는 양입니다. 즉 희생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왼쪽에 있는 염소는 애리폰εριφων인데 이는 산에서 사는 어린염소 암염소 즉 산양을 의미합니다. 자유로운 산양을 의미합니다. 이 산양을 일컬어서 마태18,12; 루카15,1되찾은 양의 비유로 설명해 주면서 잃은 한마리의 양이라고 했습니다. 즉 최후의 심판날에 예수 그리스도왕은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18,14)는 말씀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마지막 잃은 양 한마리까지 모두 구원하러 오신다는 것입니다. 한마리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요한6,39-40)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리고, 그런 다음에, 그렇게 모두 살리신 다음에 가른다는 것입니다. 오른쪽과 왼쪽으로. . . 이것이 최후의 심판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오른쪽에 있는 이들이고 또 누가 왼쪽에 있는 이들입니까??? 나는 오른쪽일까요??? 아니면 왼쪽일까요???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이들이 어떤 이들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화가 있습니다.

두 물동이라는 예화입니다. 누가 오른쪽이 있는 이들이고 또 누가 왼쪽에 있는 이들인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시골에 물장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긴 막대 양끝에 각각 물동이를 걸어서 물을 지어날랐는데 그의 오른쪽 물동이는 온전한 반면에 왼쪽은 금이간 물동이였습니다. 그래서 물장수는 금간 물동이가 더 벌어지지 않게 철사로 엮어서 사용을 했습니다. 날마다 새밋가에서 물을 길어 목적지에 다다르면 이 금이간 물동이에 물은 절반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물장수는 항상 물값으로 두동이가 아니라 한동이 반 값밖에 받아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물을 담아 내는 삼년동안 온전한 물동이는 자부심을 느꼈지만 금간 물동이는 뭔가 씁쓸하고 허전한 마음에 괴로움을 감출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금이간 물동이가 물장수에게 자기의 괴로운 심경을 고백했습니다. "저 물동이가 삼년동안 한방울의 낭비도 없이 자기 임무를 완수하는 동안 나는 가까스로 절반 정도 밖에 채우지 못했어요. 그것도 내 능력이 아니라 당신의 빠른 발걸음 덕분이었지요. 그래서 지금 내 자신이 염치없고 당신께 미안해요." 그러자 물장수가 금이간 물동이에게 말했다. "나는 네가 더 자랑스럽다. 저 길가 왼편에 피어있는 꽃들을 보아라. 그들은 삼년동안 네가 흘린 물방물로 오늘도 저렇게 활짝 피어 웃고 있을 수 있지 않니. 그래서 나 또한 그동안 저토록 환하게 미소짓는 꽃들을 거두어 내 주님의 제단에 기쁘게 바칠 수 있었어. 그 기쁨의 가치는 엄청나서 값으로는 환산할 수 없어. 모두 네 덕분이야. 고마워 금간 물동이야!!”

어떻습니까??? 어떤 이가 오른쪽에 있는 이들이고 또 어떤이가 왼쪽에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예화를 하나 더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느 이발사의 봉사활동이라는 예화입니다.

어느날 꽃가게 주인이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고 이발요금을 건내자 이발사가 요금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번 한 주간은 제가 사회봉사를 하고 있어서요."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다음 날 아침, 이발사가 문을 열었을 때에 문앞에는 열두 송이 장미꽃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어서 건너편 빵집 주인이 이발소에 들어와서 머리를 깎고 이발 요금을 건네자 이발사가 요금은 필요없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요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번 주간은 제가 사회봉사를 하고 있어서요." 그러자 빵집 주인은 만족하며 돌아갔습니다. 점심 후 이발사가 문을 열었을 때에 문 앞에는 도넛 열두개와 바게트 빵 열두개가 담겨있는 종이 봉지가 감사편지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국회의원이 이발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이발 후 요금을 내려고하자 이발사가 정중히 요금을 거절하며 똑같이 말하였다. 국회의원은 매우 만족하며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이발사가 가게 문을 열었을 때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발소 앞에는 국회의원 열두명과 도의원 열명, 지방의원 열다섯명에 시장 부인과 비서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 여섯명이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이제 누가 오늘쪽인지 또 누가 왼쪽인지 마음에 와 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누구때문에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갈라지게 됩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가장 작은 이들입니다. 이들을 우리가 어떻게 맞이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오른쪽이 되기도 하고 왼쪽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누가 가장 작은이들일까요??? 자기 자신이 벼랑끝에 섰을 때에 버림받은 이가 가장 작은들이 아닐까???합니다. 그때에 쫓겨나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있는 이들이 가장 작은 이들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버림받았고 또 누가 벼랑끝에 서 있습니까??? 일상속에서 그런 인물을 찾는다면 너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도 알고계시듯이 베트남의 반 투안 추기경님과 같은 분이 가장 작은 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오랜 세월 감옥에서 갇혀 지내며 그렇게 버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추기경님은 1975년부터 13년동안 감옥에 갇히셨는데 그때에 신자들의 도움으로 정말 어렵게 기적적으로 미사를 드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반 투안 추기경님이 감옥에서 드린 미사야말로 세상에서 드릴 수 있는 가장 작은 이들이 봉헌한 미사였던 것입니다. 수감중인 추기경님은 당신의 손바닦에 작은 제병과 함께 포도주 세방울과 물 한방울을 떨어뜨려서 매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때에 당신이 드렸던 미사는 세상에서 가장 작았지만 가장 아름다운 미사였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분보다 더 작은 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이름없는 부제님이신데 반 투안 추기경님보다 40년전에 살았던 분이십니다. 이분은 카를 부제님입니다. 카를 부제님은 독일 레스에서 태어나 클레베라는 작은 도시에 살았는데 1939년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부제품을 받자마자 나치 친위대에 붙잡혀서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갇히게 됩니다. 다하우 수용소 또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벌어졌던 학살이 똑같이 자행되었던 곳입니다. 그곳에서 카를 부제님도 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런데 카를 부제님이 가스실에 들어갈, 죽음의 날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 심한 폐결핵에 걸려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고 맙니다. 카를 부제님이 쓰러지면서 죽기전에 한가지 소원을 말했는데 죽기 전에 사제서품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는 1944년이었는데 부제품을 받고 5년동안 강제수용소에 갇혀있던 중이었습니다. 독일군은 부제님의 마지막 소원을 듣고 가스실이 아닌 비밀장소로 데려갔습니다. 마침 같은 수용소에 수감중인 주교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 역시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만, 카를 부제님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직접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수감중인 주교님이 오셔서 비밀리에 사제서품을 주셨습니다. 폐결핵이라는 병으로 죽어가던 한 부제가 그토록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때는 19441217일이었고 사제서품 장소는 다하우 강제수용소였습니다. 사제품을 받고 카를 신부님은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마지막으로 죽을 힘을 내어 독일군에게 마지막 소원을 한 번 더 간곡히 말합니다. 이번에는 부제가 아닌 사제로서 마지막 소원이었습니다. 그것은 죽기 전에 미사 한대를 봉헌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서품은 받았으나 첫미사를 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말에 감동을 받은 독일군은 그를 강제수용소 병원으로 데려갔고 몸을 가룰 기력마저 없던 카를 신부님은 수용소 병원 침상에 누워서 그 생애의 마지막 미사이자 첫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카를 신부님은 그 유일한 미사 한대를 봉헌하기 위해서 벼랑끝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강제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몸에 지니고 있었던 종이쪽지가 있었는데 그 쪽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해방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항상 그리스도 안에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이 수용소 안에서도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수용소 안에 갇혀 있지만 온전히 자유롭습니다. 추주검이 되어 이곳에서 죽어 가고 있지만 저는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그 어떠한 길이라도 하느님과 함께라면 모든 길이 다 아름답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날은 바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날이라는 것을 명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가장 작은 이들과 함께 할때에 기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내가 가장 작은 이들 중에 한 사람이라고 느낄 때에 우리는 하느님 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복된 양, 아뉴스 데이, 하느님의 어린양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