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가해 연중제24주간 월요일 루카7,1-10 (230917 성바// 240916 ---)

jasunthoma 2023. 9. 17. 22:0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여기서 예수님이 감탄하신 이런 믿음이란 백인대장이 오늘 고백했던 겸손한 응답입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이 말을 다시말하자면 주님! 제가 무엇이기에 주님을 제 집 지붕아래에 모신다는 말씀이십니까???라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제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십니까??? 라는 말은 다윗이 사울왕에게 쫓겨 다닐 때에 기도드리며 노래했을 법한 시편인데 시편8,5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여기에서 첫 번째 말하고 있는 인간은 시편을 노래하는 자기 자신 다윗을 말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에 등장하는 사람은 인류의 첫 인간인 아담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그렇다면 백인대장이 제가 무엇이기에...” 라고 고백할 때에 라는 말은 시초부터 마지막까지 또는 왕부터 종까지 온 인류를 통틀어 형제애를 느끼게하는 한 인간의 보편적 겸손함의 믿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루카1,45의 엘리사벳의 고백과도 같습니다. 엘리사벳이 뭐라고 노래했습니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여기서 엘리사벳도 마찬가지로 인류의 보편적인 형제애를 지니고 마리아의 믿음에 감탄하며 천상 어머니의 방문을 기쁘게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오늘 복음 첫 장면으로 돌아가서 백인대장의 믿음에 예수님께서 왜 감탄을 하셨는지 잠시 머물러보면 좋겠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으니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자기 종이 낫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이는 백인대장의 종이 단지 종으로서 훌륭한 종이라서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 본문을 보면 백인대장의 종은 두 부류로 소개되고 있는데 노예와 종으로 소개됩니다. “마침 어떤 백인대장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유다인의 원로들을 보내며 와서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간곡히 청한 내용은 백인대장의 노예를 살려주시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직접 그의 집으로 간다고하니 백인대장이 이번에는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다시 청합니다. 이때에는 노예가 아니라 종을 낫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번거롭게 직접 찾아오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면 자기 종이 낫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다인 원로를 통해서 청할 때에는 노예였는데 백인대장의 친구들을 통해서 청할 때에는 종입니다. 성경본문에 노예는 둘론δολον으로 되어있는데 원형 둘로스δολος는 노예, 예속된, 노예 근성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에서 종은 파이스πας인데 파이스는 아들, , 아이, 자식, 소년, 소녀, 젊은이, 노예, 하인, 종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린 노예 또는 어린 종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종합해보자면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의 노예가 죽게 되었는데 어린 종을 낫게 해달라는 청원을 했고 예수님이 백인대장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어린 종이 아니라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감탄하신 백인대장의 믿음은 노예를 종으로 불렀다는 믿음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노예가 죽을 병에 걸리기 전예는 노예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그가 죽을 병에 걸리자 어린 종처럼 여겨졌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즉 노예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자기 자식처럼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백인대장의 믿음이 보편적 믿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백인대장은 더 이상 군대가 아니라 공동체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군인대장이 아니라 무엇입니까??? 아버지로서 가장이 된 것입니다. 이를 달리말하자면 직업이 아니라 가족이 되고 조직이 아니라 가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삶과 행적을 통해서 이런 믿음을 지닐 수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께 그렇게 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을 오늘 제1독서 1디모테오2,4-6에서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오늘 하루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연중제24주간 월요일 루카7,1-10 (20240916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노예를 살려달라는 백인대장의 청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찾아가서 직접 청원하지 않고 두차례에 걸쳐서 사람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간접청원을 합니다. 첫번째 청원전달자는 유다인의 원로들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친구들을 보냅니다. 자신이 직접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병들어 죽어가던 노예가 살아나서 건강한 몸이 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밝혀지는 않는 결정적인 백인대장의 점진적인 믿음의 변화를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번째 청원전달자인 유다인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청원하자 예수님께서는 몸소 백인대장의 집으로 가십니다. 그리하여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이번에는 친구들을 보내어 청원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깊이 생각해볼 것은 백인대장이 두번째는 친구들을 보냈다는 점입니다. 유다인의 친구는 유다인이고 이스라엘의 친구는 이스라엘인이듯이 백인대장의 친구들은 다른 백인대장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부하가 아니라 백인대장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백인대장은 무엇때문에 끝까지 집에 남아있으면서 그의 친구들을 보냈을까요??? 노예의 수발을 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의 부하들이 노예의 수발을 들었겠지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예수님께 보내고 나서는 직접 간호를 하며 수발을 들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