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가해 연중제23주일 마태18,15-20 공적인 죄와 사적인 죄(230909 성바//240814 스승)

jasunthoma 2023. 9. 9. 16:4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충고와 기도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충고는 개별적으로하고 기도는 함께하라는 것입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여기서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에서 죄는 오늘 복음 다음에 이어지는 21절의 베드로가 말한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에서 죄와 다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라고 말할 때에 죄는 베드로 개인에게 해당되는, 개인에게 범하는 잘못을 말하는 반면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에서 죄는 공동체에 해당되는, 지극히 공적인 일과 관련된 장상에게 범하는 잘못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둘 다 그리스본 성경에서는 하마르테새이μαρτήσῇ ἁμαρτήσει로 되어있습니다. 하마르테새이의 원형 하마르타노μαρτάνω는 놓치다 엇나가다 빗나가다 실패하다 실수하다 잘못하다 잃다 뺏기다 무시하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을 달리 표현하자면 형제가 너를 놓치거든, 엇나가게 하거든, 빗나가게 하거든, 실패하게 하거든, 실수하게 하거든, 잘못하게 하거든, 잃게 하거든, 빼앗기게 하거든, 무시하거든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하는 죄는 먼저 타일러야하고 바로잡아주어야 하는 죄인 반면에 21절에서 베드로가 말하는 죄는 곧바로 용서해야하는 죄로 구분이 됩니다.

공적인 죄는 타일러서 바로잡아야하기에 여러 가지로 설득을 하고, 때로는 부탁을 하고 구슬리고 떼를 쓰기도 해야합니다. 왜냐하면 공동체에 반대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장상에게 범하는 잘못이기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이와 같은 죄가 자리를 잡게 된다면 공동체의 기초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죄는 곧바로 용서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순전히 개인적인 모욕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욕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 또는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해야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프라이버시를 중시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개인적인 모욕에 해당하는 잘못을 더 못참아합니다. 그러면서 반대로 공동체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공적인 죄에 관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개인에게 범하는 잘못을 못 참아하고 이에 관대하지 못한 사람을 매정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들려주십니다. 이 매정한 종의 비유에 등장하는 두 빚쟁이는 하나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로서 공적인 빚을 진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친구와 친구로서 개인적인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공적인 죄를 탕감해주고 살 길을 열어준 임금님에 비하여 매정한 종은 어떻게 했습니까??? 친구를 고발하고 단죄하여 감옥에 가두어버립니다. 그 매정한 종의 이야기를 들은 임금은 그 종을 불러들여 고문형리에게 넘기고 공적으로 진 빚을 다 갚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마태오복음 18장부터는 공동체 설교에 해당되는데 주제는 하늘나라입니다. 즉 공동체와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가 무엇인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누구인지를 22장까지 공동체의 입장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가 가장 큰 사람이고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며, 작은이를 없신여기지 않고, 길잃은양 한 마리를 찾고 기뻐하듯이 작은이를 찾고 기뻐하는 곳이 곧 하늘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기초는 만나서 타이르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네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에서 알 수 있듯이 그를 공적인 일로 따로 만나야 합니다. 장보러 가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따로 단 둘이 공적으로 만나서 타이르는 일에서 하늘나라는 시작됩니다. 여기서 타이르다는 말은 충고하고 나무란다는 의미가 아니라 때를 쓰는 일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때를 쓰는 일은 설득하고 부탁하고 구슬리는 일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에 그 형제가 말을 들으면 그 형제를 얻은 것입니다. 즉 잃었던 양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에게 알리고 그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서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지막까지 그 형제를 단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교회의 말을 듣지 않아도 어떻게까지만 해야합니까??? 고발하고 단죄해서 감옥에 가두는 매정한 종이 아니라 그저 다른 민족이어서 그러려니, 혹은 그가 세리라서 그러려니 하라는 것입니다. 문화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천성이 달라서 그러려니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각자 사회와 공동체가 지향하는 환경과 시스템이 달라서 그렇기 때문에 그 종이 그가 잘하는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자기와 어울리는 곳을 찾을 수 있게 해야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형제를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잃었지만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나서 타이르기 위해서는 형제들과 자주 부딪치고 눈을 마주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를 개별적으로 만나서 타이르는 일이 얼마나 까다로운 일입니까???

마리오 수사님이 계실 때에 형제들이 마리오수사님과 마주치게 되면 갑자가 뒤를 돌아서 오던길을 되돌아 가던 일이 있었습니다. 특히 창고쪽에서 -> 성모상방향으로 오실 때!!!

꼭 그렇지만은 않겠지만 사람만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언제나 먼저 찾아가고 만남을 주선하고 직접 만나러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육신은 만났으나 갈라진 마음은 결코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충고는 개별적으로하고 기도는 함께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끼리의 만남보다 더 중요한 만남이 무엇인지를 먼저 깨달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물은 결국은 바다로 모이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물이 바다로 모이는 것은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넓어서이겠지만 꼭 그런것만도 아니고,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어서 이겠지만 꼭 그래서 그런 것도 아닐 것입니다. 모든 물이 바다로 모이는 것은 바다가 하늘과 가장 가까운 물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우리가 있는 곳에 항상 누가 근원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 그 안에서 만나고 부대낄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