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가해 연중제21주간 월요일 마태23,13-22 (20230828 부산협력)

jasunthoma 2023. 8. 27. 21:4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차례 불행선포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에는 모두 일곱차례에 걸친 불행선포가 나오는데 이 일곱차례 불행선포는 위선자들에게 하신 충고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위선자라함은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자신을 가장하고, 숨기고, 가진체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개종한 이방인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다주의자들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들이 하는 일은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리는 일, 개종한 사람을 저희보다 못된 자식으로 만드는 일, 성전이 아니라 성전에 바친 금을 두고 맹세하는 이들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불행설교로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공모하게 되었다고 복음서는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마태오복음은 다섯가지 설교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산상설교/ 파견설교/ 비유설교/ 공동체설교/ 불행설교) 먼저 5장 산상설교에서 시작된 선포말씀이 25장 최후의 심판인 불행설교를 끝으로 완성됩니다. 그 중에서 오늘 이 일곱차례 불행선포는 이사야서에서 들려주는 불행선포와 비슷합니다. 이사5, 8.11.18.20.21.22; 6,5입니다. 5,8“불행하여라, 빈터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해가고 밭에 밭을 늘려가는 자들!”, 5,11“불행하여라, 아침 일찍부터 독한 술을 찾아다니고 저녁 늦게까지 술로 달아오르는 자들!”, 5,18“불행하여라, 거짓의 끈으로 죄를 끌어당기고 수레의 줄을 당기듯 죄악을 끌어당기는 자들!”, 5,20“불행하여라, 좋은 것을 나쁘다 하고 나쁜 것을 좋다 하는 자들!”, 5,21“불행하여라, 스스로 지혜롭다 하고 자신을 슬기롭다 여기는 자들!”, 5,22“불행하여라, 술 마시는 데에는 용사들이요 독한 술을 섞는 데에는 대장부인 자들!”, 6,5“큰일났구나(그러한 자들이 주님을 뵙는다면, 그들은 불행하여라!), 나는 이제 망했다. . .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하지만 이처럼 이사야서의 불행설교와는 다르게 마태오 복음의 불행설교 23장부터 25장까지에서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그들이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리기 때문입니다. 즉 위선자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꿔말하면 그 말씀은 그들이 하늘나라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늘나라의 열쇠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리고 과연 하늘나라의 열쇠가 무엇이기에 위선자들에게 까지 주어지게 된 것일까요? 네 복음서를 보면 하늘나라에 관해서 만큼은 마태오 복음이 다른 세 복음서에 비해 비교적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마태오복음의 하늘나라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세 복음서(마르,루카,요한복음)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하늘나라의 열쇠에 관한 대표적인 말씀을 꼽는다면 721절을 들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그리고 또한 어제 주일 복음에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네가 매면 매일 것이고 네가 풀면 풀릴 것이다"(마태16,19) 그런데 마태오복음 7장과 16장을 연결해서 보면 하늘나라의 열쇠는 베드로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마태16장 이후로 하늘나라의 열쇠가 부여된 사람들이 점점 확장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6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매고 푸는 권한을 그에게 주셨는데 그때는 베드로에게만 하늘나라의 열쇠를 부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18,18에서 예수님께서는 기존에 하늘나라의 열쇠에 관해 하셨던 말씀이 베드로 개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제는 공동체 모든 이들, ""에게 에서 "너희"에게로 확장되고 있슴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처럼 베드로에게 하셨던 똑같은 말씀을 이제는 모든 제자들에게 부여하시고 더 나아가 오늘 복음에서 위선자들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까지 하늘나라의 열쇠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여기 하늘나라 열쇠에서 열쇠는 클레이사스κλεδας인데 클레이사스의 기본형 클레이스κλίς는 작대기, , 열쇠, , 쇄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클레이스의 원형은 클리오κλειώ인데 클리오는 닫다, 잠그다, 담장을 치다, 울타리를 치다, 에워싸다, 포위하다, 가까이하다, 옆에 있다 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클리오의 어원은 클레오κλέω인데 클레오는 말하다, 축하하다, 기념하다, 이야기하다, 가르치다 등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하늘나라의 열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닫고, 잠그고, 담장을 치고, 울타리를 치고, 에워싸고, 포위하고, 가까이하고, 옆에 있다는 의미의 하늘나라 열쇠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말하고, 축하하고, 기념하고, 이야기하고, 가르치는 의미의 하늘나라 열쇠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하늘나라의 열쇠는 클레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말하고, 축하하고, 기념하고, 이야기하고 가르치는 의미의 하늘나라 열쇠입니다. 그렇다면 이 클레오라는 열쇠를 통해서 우리는 기도하는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말하면서 기도하고, 축하하면서 기도하고, 이야기하면서 기도하고, 가르치면서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도는 제자들의 기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위선자들의 기도도 있습니다. 다시말하자면 당신의 제자들에게 허락하신 하늘나라의 열쇠와 위선자들에게 허락하신 하늘나라의 열쇠입니다. 기도가 그렇다면 제자들에게 허락하신 하늘나라의 열쇠는 무슨 기도라고 볼 수 있을까요???? 속으로 바치는 다짐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위선자들에게 허락하신 하늘나라의 열쇠는 무슨 기도라고 볼 수 있을까요??? 겉으로 바치는 맹세 기도가 될 것입니다. 즉 하늘나라의 열쇠는 제자들에게는 속으로 바치는 결심의 기도가 되지만 위선자들에게는 겉으로 바치는 맹세의 기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하지만 이처럼 다짐이든지 맹세든지 기도는 곧 하늘나라의 열쇠입니다. 누구나 하느님께 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심하는 것과 맹세하는 것은 다릅니다. 결심은 자신이 직접 스스로 하는것이고 맹세는 타인이 보는 앞에서 하기 때문에 공적인 짐을 지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결심이라함은 남 몰래 실행에 옮기는 특징이 있다면 맹세라함은 드러나게 실행을 해야합니다. 보여주어야 하고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위선자들은 결국에는 이것도 저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선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즉 위선자들은 결심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맹세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그들의 행실을 그들은 자화자찬하며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지혜로움을 경멸하십니다. 그들의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마태8,23) 그들은 잔과 그릇을 깨끗이 닦아놓고 그 속에 더러운 것들을 가득 채운다는 것입니다. 잔과 그릇은 겉과 속이 분리되어 있지만 사실 사람의 겉과 속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잔과 그릇은 겉과 속이 달라서 속에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어도 겉만 깨끗하게 닦아 놓는다면 깨끗한 듯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뚜껑을 열어서 확인 해보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사람의 속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마음에 들어 차있는 것이 입밖으로 곧장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지인 한 분이 맹장이 파열되어 수술을 하다가 대장 겉에 붙어 있는 젤형 종양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전에 대장내시경을 했는데 그 때는 아주 깨끗하다는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병은 속병이긴 한데 속의 속병입니다. 어떻게 보면 속의 겉병이기도 합니다. 이 병은 겉이 심하게 훼손 되었는데 속에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고 볼수 없는 속의 겉병입니다. 그래서 병원에가면 속을 들여다 본다고 하지만 검진을 통해서 겉만 보고 깨끗하다고 진단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 속을 들여다 보기 위해서 실시하는 각종 건강검진은 실은 겉만 훌터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바깥에서 받아들인 것은 모두 바깥으로 나가버리기 때문에 흔히 우리가 속에 담아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흐르고 통하는 모든 곳은 속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작과 끝이 개방되어 있는 것을 물리적 힘으로 막아 놓는다고해서 그 내부가 속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혈관도 마찬가지이고 뱃 속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겉과 속은 피부를 통해서 수분이 증발하고 땀이 흐르기 때문에 인체의 어느 한 곳도 속이라고 볼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한 곳은 속이 아닙니다. 정말 속에 해당되는 것은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마음이고 정신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과 정신 조차도 본질은 아닙니다. 본질을 담아두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그 그릇에 담긴 본질에 따라서 우리는 거룩해지기도하고 탐욕스러워 지기도 할 것입니다. 거룩함과 자애로움, 그리고 탐욕과 방종, 이들은 모두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입밖으로 혹은 행실을 통해서 몸 밖으로 나갑니다. 거룩한 것이 들어오면 기쁨과 찬양, 그리고 자애와 미소가 되어 나갈 것이고 탐욕이 들어오면 시기와 질투, 그리고 저주와 비웃음이 되어 나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계속해서 꾸짖으십니다. 내일도 그리고 모래도 꾸짖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잔과 접시의 겉만을 항상 깨끗이 닦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충실한 일꾼은 손쉬운 일 가벼운 일, 편한 일만을 찾아 다니지 않습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고난을 겪고 모욕을 당함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격렬히 투쟁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합니다.(1테살2,2) 그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사람의 마음 속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는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선한 결심과 맹세를 통한 두가지 열쇠를 모두 사용하여 하늘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선한 뜻을 가진 모든 이들을 초대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