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제18주간 수요일 마태15,21-28 이방인지역 첫 복음선포 첫 소문(20230809 리디아//서동성당)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하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믿음이 크다는 말씀일까요??? 여기서 믿음은 그리스어 성경에 의하면 피스티스πίστις인데 피스티스πίστις는 엘피스έλπίς와 아가페άγάπη와 함께 코린토전서 13,13에서 사도바오로의 사랑의 찬가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들었던 라틴어 피데스 스페스 까리따스와 같은 의미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방인이든 이스라엘인이든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설명할 때에 널리 사용된 신망애의 단어입니다. 이 단어들 중에서 특히 믿음 피스티스의 어원은 페이토마이πειτομαι인데 페이토마이의 페이토는 설득하다, 납득시키다, 확신시키다, 간청하다, 탄원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탄복하신 가나안 여인의, 이 믿음의 근원에는 끈기있는 신앙활동을 동반한 믿음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이 믿음에 대하여 참으로 큰 믿음이라며 탄복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끈기있는 참을성을 동반하기 위해서는 댓가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데 어떻게 끈질긴 끈기와 참을성이 있는 신앙을 지닐 수 있겠습니까. 그 댓가나 혜택을 받으리라는 희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마르코복음에서도 소개되고 있는데 서로 공유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두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는데 특이할만한 점이 있다면 두 차례의 빵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 사이에 오늘 복음이 소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있고 그리고 오늘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확인 하신 후에 사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면 당신의 소문이 널리 퍼지지 않을 수 있을까? 하고 걱정이라도 한 듯이 아예 갈릴레아에서 이방인 지역인 티로지역으로 복음선포장소를 바꾸기에 이르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물러가신 뜻밖의 이방인 지역 띠로는 바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즉 바위가 있는 지역으로 물러가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하면 내가 세상에 좀 더 알려져서 유명해질 수 있을까? 하며 고민하고 기대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어떻게 하면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을까?하며 이방인 지역으로 물러가시고 또 어떤 집으로 들어가 숨으셨으나 결국 숨어계실 수가 없었다하고 마르코 복음은 그 상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더러운 영이 들린 딸아이를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이방인 부인은 예수님을 찾아가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예수님께 청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가 그분 발 앞에 엎드려 강아지처럼 머리를 조아릴 만한 믿음을 가져다준 그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이 부인이 예수님을 찾아오도록 확신을 주었던 그 소문의 내용은 과연 어떤 말씀이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소문만 들어도 구원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는 그 강한 선포는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 내용은 곧 위에서 언급했던 이방인 지역인 띠로까지 전해진 첫 복음선포에 관한 내용과도 같을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그들에게 첫 복음선포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선포 말씀에 접근하기 위하여 네 복음서를 함께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방인 지역에서의 첫 소문은 갈릴레아에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와 내용상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네 복음서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면서 오늘 이교도 페니키아 부인이 소문으로 들었던 예수님의 관한 소문은 바로 "생명의 빵"에 관한 요한복음의 가르침과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의 빵"에 관한 소문이 멀리 이방인 지역까지 선포되었던 것입니다. 먼저 네 복음서에 모두 소개되는 오천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이 있은 후에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은 물위를 걸으시고 이어서 이방인 지역으로 장소를 옮기시게 됩니다. 네복음서의 흐름상 그 시기에 해당되는 예수님의 선포내용이 요한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천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이후에 요한복음에서는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하며 투덜거렸는데 유다인에게는 듣기 거북한 이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이 이방인에게는 구원의 말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예수님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빵"이니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내용(요한6,22-60)입니다. 이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방인 여인에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심한 모욕을 안겨주십니다. 이방인 여인을 일컬어 강아지로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그 모든 것을 받아 삼켰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먼저 강아지들에게 던저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모욕을 주었지만 이 여인은 상아래있는 강아지들도 그 자녀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그보다 더한 시련도 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응답한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식사하기 전에는 한움큼의 물로 손을 씻고나서 식사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식사가 끝나면 식사 때에 남은 빵으로 손을 비벼 씻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일부러 남겨두는 것입니다. 그때에 손을 비벼서 씻고 손바닥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는 식탁 아래에 있던 강아지들의 차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정결례에 사용된 부서진 빵 가루만으로도 생명을 얻는데 그리고 구원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확신에 찬 믿음을,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는 소문만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닥아지고 씻겨지고 바수어진 빵이 곧 예수님이심을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입에는 꿀같이 달았으나 받아 삼키면 쓰리고 거북하다고 하였습니다. (요한6,60; 묵시10,10; 에제3,3) 그렇다면 요즘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러한 듣기 거북한 말씀을 받아삼키고 있는지 자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만약에 요즘 나에게 듣기 거북한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의 삶을 한번쯤 돌아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낮추아니 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안에서 부서지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서짐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