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가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 스테파노 마태10,17-22 증언 순교 프네우마 네페쉬(프쉬케) 루아흐 일치 사랑(0705 리디아/ 1226 바딸)

jasunthoma 2023. 7. 4. 04:32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 때문에 . . .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아버지의 영이 우리를 대신해서 증언을 해 주시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죽게하고 죽이는 일이 일어날까요???? 여기서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는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어떻게 이해해야 이런 전쟁터와 같은 박해 속에서 우리 마음속이 평화로울 수 있을 까요???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증언할 것이다에서 증언은 마르티뤼온μαρτύριον인데 마르티뤼온은 증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순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시말하자면 "증언할 것이다"는 이말씀을 같은 의미의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증언을 순교로 바꿔서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순교할 때에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마라입니다. 순교할 때에 입니다. 즉 다시말하자면 너희가 순교할때에 걱정하지마라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순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순교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영"에 관해서 조금 생각해보자면 여기에서 은 프네우마πνεμα(소마σώμα육신과 프쉬케ψυχή영혼: 마태오10,28-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인데 프네우마는 공기, 바람, 숨, 호흡, 생명, 영혼, 정신, 영적존재, 천사 등을 의미합니다. 이 "영"은 창세기 1,2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영"과 같은 영이신데 루아흐입니다.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시편에서 말하는 영은 네페쉬입니다. 이는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하는 시편22장 본문에서 마지막 구절에서 "내 영혼은 그분을 위하여 살고"라고 절규할 때의 ”을 말합니다. 다만 창세기의 루아흐는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영인 반면에, 시편의 네페쉬는 생물학적 사람의 생동하는 기운과 냄새를 포함한, 영의 인간적 의미가 더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영이 그토록 만물 위에 머무르는 기운이라면 순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순교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를 또 다른 느낌으로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순교하는 이는 아버지의 공기다, . . .아버지의 바람이다, . . .아버지의 기운이다, . . .아버지의 숨, . . .아버지의 호흡, . . .아버지의 생명, . . .아버지의 영혼, . . .아버지의 정신이다 그러니 순교를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순교는 하나의 바람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순교는 코끝에 스치는 향긋한 냄새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순교하는 이는 우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신 바람결과 숨결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에서 아버지의 영이 순교한 장면을 떠올린다면 어느 장면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은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시편22장의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를 절규하듯이 외치셨는데 마태오 복음 27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그리고 숨을 거두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숨을 거두셨다에서 "숨"은 위에서 언급한 "아버지의 영"에서 "영"과 같은 프네우마인데 이 프네우마는 시편22장의 네페쉬를 그리스어로 옮겨놓은 당신의 영과 같은 의미의 아버지의 "영"을 의미합니다. 자기자신의 영을 아버지의 영에 돌려드린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순교를 했지만 그 영은 이제는 내 영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시다는 말씀이 됩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창조적 영(루아흐)은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잠시 위임 받았던 그 영이 순교를 통해서 아버지 영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요한13,3) "당신이 맡기신 일을 완수"(요한17,4)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어지는 오늘 복음 후반부에서 다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거북했던 부분인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 또한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한다는 이 말씀은 “형제가 형제를 넘겨 순교하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순교하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순교하게 할 것이다입니다. 어떻습니까??? 형제가 형제를 넘겨 순교하게 한다. . . 그렇게 한 일이 있었습니까??? 실제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리고 이같은 순교가 있었습니까??? 아니면 없었습니까??? 창세기부터 쭉 생각해보자면 아브라함과 이사악이야기, 요셉과 그 형제들 이야기, 모세와 그 어머니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 마카베오서 하권에서 어머니와 일곱아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서 일곱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순교하라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도 마지막에 순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자식을 둔 부모라면 자식들에게 갑자기 순교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평소에 살아온대로 순교를 하기도 하고 배교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가 평소에 순교의 삶을 살았다면 자식에게 순교하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절개없이 살고있는 내 모습을 집안 식구들이 모두 보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너희는 당당하게 순교해야 한다고 한들 그를 믿을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왜냐하면 순교의 삶을 산다는 것은 멀리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자기와 가장 가까이 있는 자식들과 집안 식구들에게  순교를 해야 그 다음에 하느님을 위해서도 순교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나와 가장 가까운 자녀들과 그보다 더 가까운 부부로부터 일어나는 순교 그리고 또한 형제자매들 간의순교를 먼저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느닷없이 갑자기 하느님을 증거한다며 순교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일상에서의 증언, 일상에서의 순교를 살아갈 수 있도록 작은 일에 충실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뭐라고 했습니까??? "나를 본받으십시오" 죽는 것도 나에게 이득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도 마지막 옥중서한 21번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 온갖 일이 막비주명(莫非主命하느님의 명이 없을 수 없음)이오. 막비주상주벌(莫非主賞主罰하느님의 상벌이 없을 수 없음)이라. 고로 이런 군난도 또한 천주의 허락하신 바니, 너희 감수 인내하여 위주(僞主)하고 오직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 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 천만 바란다. 잘 있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