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가해 연중제9주간 수요일 마르12,18-27 천사들과 같은 삶(20230607 리디아)

jasunthoma 2023. 6. 5. 14:1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사두가이들은 왜 부활이 없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들이 오늘 예수님께 물었던 이야기는 일곱형제의 아내 이야기인데 이는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 후손에 관한 족보이야기입니다. 첫째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어서 둘째가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였지만 그도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곱형제가 모두 큰형수님을 아내로 맞아들였지만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고 맨 마지막으로 그 형수님도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부활이 있다면 그들이 다시 살아날 때에 그 여인은 그 일곱형제 가운데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하는 질문을 예수님께 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하느님이 모세에게 알려준 당신의 이름을 통해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예수님의 이 대답은 즉 부활때에 일곱형제를 맞아들였던 아내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냐는 질문은 올바른 물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시다라는 말씀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곱형제와 한 아내 이야기에서 누가 죽었고 누가 죽지 않았습니까??? 누가 죽은 이들이고 누가 살아있던 이였습니까??? 첫째가 아내를 맞아들였을 때를 생각해보면 누가 죽었고 누가 살았습니까??? 둘째와 셋째와 그리고 일곱째까지 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을 때에 누가 죽었고 누가 살았습니까??? 맨 마지막에 그 부인도 죽었을 때에는 누가 살아남았습니까??? 다시 생각해보면 첫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은 아들을 의미합니까??? 딸을 의미합니까??? 그리고 둘째가 형수님을 아내로 맞아들였을 때에 둘째는 본처가 있었습니까 본처가 없었습니까??? 그리고 둘째도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은 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입니까??? 딸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잠시 마태오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족보 이야기에는 네명의 여인이 등장하는데 유다의 아내 타마르, 살몬의 아내 라합, 보아즈의 아내 룻, 다윗의 아내 밧세바 입니다. 마태오 복음에 나온 족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이지만 사실은 유다의 족보나 다름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나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나았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나았고 이사악이 야곱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외동아들이었습니까??? 왜 이사악의 대를 야곱이 잇습니까??? 그리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다고 했는데 유다가 그의 형제들보다 맏이였습니까??? 야곱의 아들이 열두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넷째 아들인 유다가 야곱의 대를 잇습니까??? 그리고 유다로부터 이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등장하는 여인 네 명은 본처가 아닙니다. 이들은 이방인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 아내의 아들이 대를 잇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타마르, 라합, , 밧세바. 타마르는 누구입니까??? 타마르는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유다의 큰아들의 아내가 타마르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라합도 롯도 밧세바도 모두 정상적인 대를 잇는 본처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대를 잇지 못했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오늘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에게 이르신 말씀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하는 이 말씀이 얼마나 심오한 말씀입니까??? 얼마나 신비롭고 감동적인 말씀입니까???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이보다 더 진귀한 행복선언이 어디에 있습니까??? 즉 예수님의 족보에서 등장하는 네 여인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자기의 육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누가 실천하느냐에 따라 후손이 이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적인 족보에서는 감추어 두고 싶고, 숨기고 싶고, 지워버리고 싶은 이름이지만 그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이어지고 이스라엘의 혈통이 이어진다는 말입니다. 이토록 복음 사가는 유다의 비정상적인 족보를 통해서 하느님의 심오하신 뜻은 헤아릴 길 없음을 숨김없이 고백했던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두가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그런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비참하고 면목없던 사람이 이토록 훌륭한 천사들과 같은 사람으로 살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 즉 사람들이 부활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는 말은 누구에게 해당되는 말입니까??? 1사무엘 2,5에서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성모님의 마니피캇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아이 못낳던 여자는 일곱을 낳고 아들 많은 여자는 홀로 시들어 간다. 주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는 분, 저승에 내리기도 올리기도 하신다. 주님은 가난하게도 가멸지게도 하시는 분, 낮추기도 높이기도 하신다. 가난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이를 거름 더미에서 일으키시어 귀인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을 믿고 있기에 오늘 이 자리에 초대받았습니다. 사두가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따르고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다름안닌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삶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바로 바오로가족입니다. 바오로가족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