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부활제7주간 월요일 요한16,29,33 길 자체 시노달리타스 (20230522 부산협력)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이겼다는 말은 열차례 나옵니다. 그 본문들을 잠시 살펴보자면 오늘 복음인 요한16,33과 그리고 1요한2,13.14에 두 차례에 걸쳐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1요한4,4 “여러분은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거짓 예언자들을 이미 이겼습니다”/ 그리고 또한 루카11,22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그리고 로마3,4 “당신께서 말씀하실 때에 당신의 의로움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당신께 재판을 걸면 당신께서 이기실 것입니다”/ 로마8,37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마지막으로 묵시록에 세차례 나오는데 묵시12,11 “우리형제들은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그자를 이겼다”/ 묵시13,7 “그 짐승에게는 또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 허락되었고, 모든 종족과 백성과 언어와 민족을 다스리는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묵시17,14 “어린양과 전투를 벌이지만 어린양이 그들을 무찌르고 승리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이겼다라는 단어가 열차례 씌였는데 이 본문들 중에 오늘 복음 16장의 마지막절인 33절에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실때 이겼다는 말은 그리스어본에 네니케카νενίκῆκα인데 원형은 니카오νικάω입니다. 니카오의 어원은 니케νίκῆ인데 니케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날개달린 승리의 여신입니다. 여기서 신약성경 본문에 열차례 나오는 니카오 중에 7차례는 요한계문헌입니다. 오늘 복음 본문과 요한1서에서 세차례 그리고 묵시록에서 세차례 나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 본문과 요한1서 세차례에서만 완료형 동사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시말하자면 승리가 성취되었다는 의미로 “이겼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요한복음은 직설법인 반면 요한1서에서 쓰인 세 번의 니카오 동사는 본문에 네니케카테νενίκῆκατε로 되어있는데 이 네니케카테는 명령법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에서 말씀하신 구절은 바로 지금 직설법으로 이겼다 “네니케카”가 아니라 명령법 “네니케카테”로 쓰인 “이겼다”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너희는 이겼어라”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신약성경을 통틀어 직설법으로 승리를 완수하신 의미로 쓰인 “이겼다” 하신 말씀은 오늘 복음 마지막 구절밖에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는 말씀은 바라거나 명령하는 부탁이 아니라 당신의 이 말씀으로 당신의 행위가 완결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그동안 걸어오신 길에 마침표를 찍는 의미입니다. 당신의 활동은 여기까지라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 활동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17장부터 예수님께서 세차례에 걸쳐 기도를 하십니다. 당신 자신을 위하여, 제자들을 위하여, 믿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만 하십니다. 기도밖에 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잡히시고 돌아가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완결하셨고 더 이상 무슨 활동을 하지 않으신다는 말일까???하고 생각해봅니다. 오늘 복음 이전에 요한복음 14,5절에서 토마스가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즉 다시 말하자면 당신은 아버지께로 통하는 길이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토마스가 그 길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길만을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진리와 생명까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보면 지금까지는 당신이 길을 걸으셨지만 이제는 길이 되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이 활동을 하셨지만 이제는 활동 그 자체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진리와 생명을 포함해서요. 또한 지금까지는 그 주체였지만 이제는 그 자체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 바탕이 되시고 근원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경본문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호도스, 알레테이아, 조에”라고 하는데 이때에 호도스,오도스ὁδός는 길이기도 한데 이 호도스는 문지방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당신은 첫머리이자 시작과 시초 기원과 근원 그 자체라는 의미입니다. 열렸다 닫혔다 하는 주체로서 문짝이 아니라 문 그 자체라는 의미로 호도스 문을 의미합니다. 시노드라는 말이 있고 요즘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 시노달리타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시노드가 함께+길= 함께 걸어가는 주체로서 길ὁδός호도스라고 한다면 시노달리타스는 함께 걸어가는 길 자체를 의미합니다. 한국교회에서 시노달리타스를 “공동합의성”으로 번역을 했지만 그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고 하여 그냥 원어 시노달리타스로 표기하기로 했습니다. 즉 지금까지는 주도하고 이끌었던 주체로서 길이었다면 이제는 존재 자체가 되는 길입니다. 이 자체로서의 길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겼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해진 길입니다. 세상에서 이겼다고 말할 때에는 어떤 대상을 굴복시키고 이끌어서 선도해 나갈 때에 이겼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시노달리타스하면서 세상을 이깁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완성하시어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세상 그 자체가 됨으로서 세상을 이기고 부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헛된 망령이 아니라 분명히 보이는 십자가와 우리 육신을 통하여 이기는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부활의 기쁨을 주시는 예수님의 안에서 생명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