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사순제5주간 월요일 요한8,1-11 (20230326 부산협력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고 당시 상황을 전해줍니다. 하지만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고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고 전해줍니다.
여기에서 두가지 장면에 머물러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고 전해주는 장면입니다.
즉 예수님의 장면과 여인의 장면입니다. 첫번째는 땅에다가 무엇인가를 쓰신 예수님 그리고 두 번째는 그들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던 여인입니다.
첫 번째 예수님은 도대체 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여자를 끌고와서 가운데에 세워놓고 고소할 때에 당신은 아무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만 하셨을까????입니다. 그들이 여인을 돌매질로 사형에 처해야한다는 규정을 내세워 예수님의 생각을 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신 이유에는 예수님의 두 가지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의도는 예수님이 고소한 자들의 증언불일치의 오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는 오늘 고소한 이들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즉 현장에서 붙잡아서 끌고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여자를 끌고 왔을 때에 손에 돌을 들고 있었는지 빈손으로 있었는지에 관해서 복음서에서 알려주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하고 말씀신걸로 봐서 그들은 손에 분명히 돌을 쥐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손에 돌을 들고 있었다면 어떻게 됩니까???? 현장에서 붙잡아서 끌고 올 때에 현장에서 돌을 집어 들었다는 얘기죠. 그런데 돌로 처죽이는 장소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 안에 있습니까??? 성 바깥에 있습니까??? 돌로 처죽이는 장소는 성 밖에 있죠. 그렇다면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붙잡힌 장소가 성 안입니까 성 바깥입니까??? 그들이 현장에서 붙잡아서 끌고 올 때에 돌을 들었기 때문에 성 바깥이라고 봐야 타당하겠죠???? 이에 관하여 신명기 22장 27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다른 남자가 이미 약혼한 젊은 여자를 만난 곳이 들(성밖)이었으므로 여자가 고함을 질렀다 하더라도 구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남자가 이미 약혼한 그 젊은 여자를 들(성밖)에서 만나 동침하였을 경우, 그 여자와 동침한 남자만 죽어야 한다” 즉 성 바깥 현장에서 붙잡혔을 경우에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만 죽어야한다고 되어있습니다. 신명기 22장 27절에요,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증언불일치의 오류입니까??? 만약 성 바깥이었으면 그 자체로는 어떤 이유로든 여자에게 돌매질로 사형에 처해서는 않되는 것이고 또 만일에 성안이었더라도 여자는 고함만 지르면 되므로 여자에게 돌매질로 사형에 처할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것이죠.
그리고 이어서 또다른 증언불일치의 오류는 땅에 무엇인가를 쓰신 두 번째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들을 비추어 보았을 때에 문헌적 근거는 없지만 이렇게 생각됩니다. 간음하다가 붙잡힌 장소가 돌밭이 아니라 땅이었음을 암시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땅에다가 무엇인가를 줄곧 쓰신 것은 아닐까 합니다. 그들이 당신을 고소할 때부터 하나씩 하나씩 물러가고 당신과 여인만 남았을 때까지 줄 곧 몸을 굽히시고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왜냐하면 성 안에는 돌로 포장된 길이 일반적이지만 성 바깥에는 맨땅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상기시기기 위함입니다. 즉 땅과 여인의 일치점을 보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줄곧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예수님의 장면에 이어 여인의 장면이 있습니다. 즉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고 전해주는 장면입니다. 여자는 그들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는 장면입니다. 그들이 끌고 오든지 말든지 그들이 고소를 하든지 말든지 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든지 말든지 그 여자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꿔다놓은 허수아비처럼 그들 가운데에 그대로 서있기만 합니다. “너희 가운데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하실 때에도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고 마침내 예수님만 남아있을 때까지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왜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 서있기만 했을까요?? 어떤 시비가 일어날 때에 아무런 항변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암묵적으로 동조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아무런 대답이나 응답이 없다는 것은 반대하는 이들 앞에서는 반대한다는 암묵적인 동의로 보아야하고 찬성하는 이들 앞에서는 찬성한다는 암묵적인 동의로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침내 몸을 일으키시고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하고 물으시고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죄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알고 계셨기에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이 모든 계략을 꾸몄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스스로 하나씩 하나씩 도망치듯이 달아났지만 여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예수님곁에 머물렀습니다. 따라서 도망간 이들의 죄는 그대로 남아있지만 그냥 그대로 예수님 곁에 서 있었던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게됩니다. 예 아니면 아니오 라고 말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아무말도하지 않았던 여인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때에 그자리를 외면하지 않고 지키는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사순제5주간에 접어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모두는 예수님을 반대하던 무리들의 계략과 그에 찬동한 이들과 암묵적으로 동조한 사람들에 의해 그리 될 것입니다. 인간의 집단 자유의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오늘 복음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예를 들어 보여주고 있고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하느님 홀로 주관하신 세상 창조의 시대는 저물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다시 오실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은 더 이상 하느님 홀로 세상을 창조하듯이 다스리시 않으시고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개와 부활로 세상을 다스리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부활 그리고 재림은 성자께서 성령과 함께 다스리시는 새로운 세상 창조의 원동력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회개의 사순시기를 잘 살아서 죄사함의 은총이 가득한 사순시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기쁜마음으로 주님의 부활을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