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재의예식다음금요일 마태9,14-15 (제주협력자// 250307 바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식이란 무엇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선한 단식과 악한 단식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어찌하여 스승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며 물어왔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어떤 것이 선한 단식인지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은 이 말씀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예수님께 어찌하여 그런 단식이 선하다는 말입니까??? 하며 얼굴을 지푸렸을 법합니다. 그러면서 자고로 단식이라 함은 바로 이러한 것이라며 "바리사이의 기도"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18,12) 자기들은 규칙적이고 체계적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선하다는 말은 동병상련을 느끼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고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태초에 인간에게 가장 먼저 동병상련을 느끼신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단식에 관한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는 동병상련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공감할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게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드러내고 알리게 되면 동병상련에 위배되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한다"는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이 바로 그러한 위배된 감정을 불러 일으켰던 것입니다. 자기들의 단식을 알리고 드러내려는 의도가 깔려있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단식이란 무엇입니까??? 기쁜일입니까??? 단식을 하면 기쁠까요??? 단식은 결코 기쁘지 않습니다. 단식이 기쁘다고 하는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배고프고 굶주린 사람을 모독하는 위선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을 혼인잔치의 신랑과 그 손님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당신과 제자들은 기뻐해야하는 신랑과 함께 기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혼인잔치 신랑과 그 일행들이 슬퍼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당신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는지를 묻는 것은 어쩌면 그저 평범한 질문같지만 바꿔서 영성생활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바람직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전통있고 이름있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오랜 세월을 극기와 절제생활에 익숙해 져 있는 그룹이었습니다. 그 방면에서는 선배이자 고참인 셈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나선지 얼마 되지 않았고 예수님으로부터 체계적인 교육도 받지 못했던 오합지졸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해명하시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열등감에 사로잡힐 수 있는 심각한 질문을 요한의 제자들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관용적이고 포용력있는 말씀으로 요한의 제자들과 당신의 제자들 모두를 감싸주십니다.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 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시작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다는 예기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단식은 규칙적인 굶주림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진정한 단식은 영성생활이 아니라 슬픔이 바탕이 될 때에 가능하다고 하신 말씀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굶주림은 없어서 못 먹는 것이고 단식은 일부러 안먹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둘 다 배가 고팠습니다. 하지만 한쪽은 굶주려서 배가 고팠고 다른 쪽은 단식으로 인해서 규칙적으로 배가 고팠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실재로 가진 것이 충분치 못해서 날마다 굶주렸고, 요한의 제자들은 금육과 금식을 지키느라고 항상 허기진 상태로 살아야 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치있는 삶을 살고 의롭게 살기 위해 요한을 따랐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단식을 하며 배고픔을 느낄 때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간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들이 소유한 것들을 모두 버리지 않고도 단식만으로, 십일조 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자신들이 행한 단식은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져야하고 모두들 이에 동참해야만 하며 또한 그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자기 소유를 버리지 않고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사랑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단식하는 이유를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단식을 하는가? 또한 무엇을 위하여 단식을 하는가???
만약 나자신을 위하여 단식을 한다면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단식이 세상에 알려져서 타의 모범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단식을 한다면 우리는 단식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빵처럼 부드러웠던 마음이 자만심에 빠져서 돌처럼 굳어질 지도 모기 때문입니다.
단식하지 않는 사람을 지도하기 위해서 단식을 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러한 단식은 가르치기 위한 단식이며, 단식의 정신을 회손시키는 단식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단식을 하니까 너희도 단식을 해야하지 않느냐는 선민, 선진, 일류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하소연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우리가 곡을 하여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우리가 단식을 하는 이유가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신랑때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푸대가 새것이라서 거기에다가 새 포도주를 담는 것이 아니라 새포도주가 빚어졌기에 그 새포도주를 담아두기 위해서 푸대가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푸대를 새것으로 바꿨다고 그 속에 담긴 묵은 술이 새술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포도주가 없으면 푸대는 존재의 의미가 사라지듯이 신랑을 빼앗길 때에 비로소 잔치의 의미는 사라지고 절식과 단식의 의미가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극기와 절제가 선하고 의미있는 일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신랑의 존재여부가 결정적이라는 얘기입니다.
신랑과 상관없이 영성생활을 하기 위해서 규칙적으로 배고프게 된다면 스스로 악한 단식의 유혹에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극기와 절제가 아름다운 단식, 선한 단식의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