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성탄팔일축제내제5일 루카2,22-35 세가지 찬미가(성바)
성탄 팔부축제를 지내는 동안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더불어 세차례에 찬미를 듣게됩니다.
특히 오늘 복음인 루카복음에서는 성탄을 알리며 기뻐하는 시메온의 세번째 찬미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찬미의 노래는 천사가 목동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며 부른 천사들의 찬미가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2,14)
이 구절을 떠올릴 만한 찬미가를 가톨릭성가에서 찾아본다면 101장이 되지않을까합니다.
"지극히 높으신이의 탄생하심을 알리는 거룩한 천사의 무리 천상음악 노래하네~~~글로오오오오~~~오리아!! 인엑스첼시스데오"(가톨릭성가101장 1절)
그리고 두번째 찬미의 노래는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달려가서 아기예수님을 찾아 뵙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찬양하며 부른 찬미가입니다.(루카2,20) 첫번째는 천사가 그리고 두번째는 목동이 듣고 본 그대로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떠올릴 만한 찬미가를 가톨릭성가에서 찾아본다면 102장이 되지 않을까합니다.
"모든 형제들아 즐겨 노래하며 베들레헴 성밖에 달아가세~~ 구세주 그리스도 강생하셨도다 어서가 경배하세 어서가 경배하세 어서가 경배하세 경배하세"(가톨릭성가102장 1절)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찬미가는 오늘 복음으로 선포된 예루살렘 성전에서 울려퍼지는 시메온의 노래입니다.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성전으로 들어오자 시메온이 아기를 두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부른 노래입니다.(루카2,28)
이 구절을 떠올릴만한 찬미가를 가톨릭성가에서 찾아본다면 105장이 아닐까 합니다.
"하늘의 아기여 참귀한아기 정성을 다해 모두경배드리니 당신 착한 마음 내려주소서 당신만을 사랑하겠나이다~~당신 착한 마음 내려주소서 당신만을 사랑하겠나이다"(가톨릭성가105장 1절)
그런데 상대적으로 마태오복음에서는 이러한 찬미의 노래를 어머니의 통곡소리로 표현했습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찬미는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것 같습니다.
찬미가를 부르다보면
기쁘게 부르다가도 어느 순간이 되면 한없이 슬퍼지는 것 같고
슬프게 부르다가도 기쁨이 몰려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신부님의 베개 찌글통 이야기
우리는 지금 자비의 해를 보내고 있는 동시에 다다음달 2월2일까지 봉헌생활의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봉헌생활을 한다는것은 결코 한평생 독신으로 보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대신학자인 클라우스베르거에 의하면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성탄의 의미는 다양성 안에서 일치성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예수1, 246참조)
이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상징적이면서 동시에 실존적인 표징이 다름아닌 공동체 찬미가를 함께 부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기도와 찬가는 현세를 살면서 천국을 미리 맛보는 것이요 영광속의 일치로 나아가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기도와 찬미가는 성령의 이끌림으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시메온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유쾌하든 불쾌하든 우리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시간으로 바쳐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04/12/28 루카2,22-35
로사리오 기도 중에 예수님을 성전에 드리심을 묵상하는 신비가 있다.
이스라엘 율법에는
맏아들은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데 부모가 대신 키우는 조건으로
제관에게 얼마의 사례(20데나리온)를 해야 한다고 한다.
물론 돈은 동네에서 가까운 제관에게 지불하고 성전에는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베들레헴에서 나신 예수님은 포대기를 덮고 구유에 뉘여서 지냈다.
가진게 별로 없는지라 정결례를 치를 때에도
어린양 대신에 비둘기 한쌍을 제물로 바쳤다.
이렇게 가난하게 오신 예수님은 성전에 몸소 예물로 바쳐졌다.
있는 집안 아들 같으면 돈으로써 해결을 봤을 것이고
달리 없는 집안이었으면 율법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감히 귀한 아들을 몸소 바치려는 용기는 엄두도 못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리아와 요셉은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을 함으로써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되고 멀리 이방인들에게까지
그 구원의 빛이 비치게 되었다.
이에 성령의 감도를 받아 노래한 시므온의 찬양에
아기의 부모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이렇게 아기 예수님은 가난하게 오셨지만
인간적인 부귀를 멀리하시고 하느님의 뜻대로 바쳐짐으로서
우리는 성탄 팔부축제에 찬양과 영광을 노래하고
이웃과 함께 기뻐 지낼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