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제32주간 금요일 루카17,26-37 계약의 완성(제주협력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고 하신 이 말씀은 제자들이 사람의 아들이 오는 그 곳이 어디인지를 물었을 때에 말씀하신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물어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질문한 것은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둔다는 말씀에 대한 걱정스러운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는 어디로 데려가고 또 하나는 어디에 버려둔다는 것입니까??? 하고 질문한 것과 같습니다.
그 질문은 먼저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때와 롯때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어서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고,
또한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가중되면서 더욱 궁금해 졌던 것입니다.
어쩌면 갑자기 종말이 다가온 것 같기도 하고 심판때가 다가온 것 같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고 하신 비유의 뜻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먼저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관하여 창세기 12장부터 15장까지의 장면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12장에서 아브람이 부르심을 받고 하란땅을 떠나 가나안으로, 그리고 이집트로 갔다가 다시 가나안 땅에 정착하였습니다.
13장에서는 아브람의 조카 롯이 분가를 하는데 아브람이 롯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서 갈라져 나가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그러자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비롯하여 요르단의 온 들판을 제 몫으로 선택하여 동쪽으로 가고 아브람은 그대로 가나안 땅(헤브론)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14장에서는 롯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아브람이 롯을 구하기 위해 출정하여 연합군을 무찌르고 롯과 잡혀간 사람들과 함께 그의 모든 재물을 거두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자 살렘(예루살렘) 임금 멜키체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마중나와서 아브람에게 축복을 하자 아브람은 그의 모든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살렘왕 멜키체덱에게 주었습니다.
15장에 이르러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비유를 설명해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아브람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기 위해 삼년된 암송아지 한마리, 삼년된 암염소 한마리, 삼년된 숫양 한마리 그리고 산비둘기 한마리와 어린 집비둘기 한마리를 가져와서 반으로 잘라 잘린 반쪽을 서로 마주 보게 차려놓았습니다.
그때에 맹금류들(솔개,독수리)이 죽은 짐승들 위로 날아들자, 아브람은 그것들을 쫓아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를 둘로 갈라 놓는다는 것은 계약을 상징함과 동시에 한쪽은 그 곳에서 떠난다는 의미도 함께 상징합니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그대로 버려둔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둔다는 것일까요???
아브람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뒤 약 500년 뒤에 모세가 태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나이 광야에서 머물고 있을 때에 하느님과 또 한차례에 계약을 맺게 됩니다.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그동안 이스라엘이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회상하고 또 앞으로 미래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상기시켜 주는 대목이 나옵니다.
"너희는 내가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탈출19,4)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지난날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그리고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관해서 알려주고자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공으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하다
맥시 필러(Maxcy Filer)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1966년, 36세에 처음으로 캘리포니아 주 사법 시험에 응시했다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재수를 했지만 또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는 시험을 보고 또 보았지만 계속 떨어졌습니다. 그 다음에는 로스엔젤레스, 샌디에고, 리버사이드, 샌프란시스코 등 시험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응시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들이 어릴 때 처음 시험을 보기 시작했는데 그 아들들이 전부 사법 시험에 합격하고 난 뒤에도 맥시는 시험을 치렀다고 합닏. 나중에 아들들이 차린 법률사무소에서 재판연구원으로 일하면서도 응시를 했습니다. 그의 도전은 사람들이 은최를 생각할 나이가 되었을 때도 계속되었습니다. 25년 뒤에 전형료와 시험 준비 코스 수강료로만 600만원 가까이 지출하고 인생의 144일을 시험고사장에서 보내고 나서 그는 48번째 사법시험을 치렀고 드디어 합격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61세였다고 합니다.
운전면허시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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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시나이 광야에서 40년간을 헤메고 있었지만 그럴때에도 그들은 방향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아브람이 하란에서 가나안 살렘땅을 거쳐 이집트로 갔다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4천년 역사안에서 그들이 어디로 유배를 가더라도 그들의 목적지와 방향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곳이 이세상의 종착지도 아닌데 어찌하여 그들은 그토록 예루살렘으로 방향이 고정되어있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바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계약을 파기함과 동시에 계약이 완성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갈라졌던 계약이 그곳에서 하나로 합쳐져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고 하신 말씀의 또 다른 측면은 두가지 계약이 완성되는 장소로 볼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여기서 시체를 상징하는 것은 물질이자 죽음이라면 독수리를 상징하는 것은 영혼이자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는 말씀은 영지주의(이데아론)와 물질주의(유물론)를 극복한 생명주의, 또는 사랑주의, 또는 성령주의 차원에서 하신 말씀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는 말씀이자 물질이 있는 곳에 영혼이 있다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2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적"에 관하여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적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지 않는 자들로서 세상을 현혹하게 만들고 세상을 속이는 자들이라고 요한2서에서는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들은 세상을 언제나 이원론적으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적은 영적인 것만 살길이다 라며 육신을 쓸모없는 것으로 보는 영지주의자 일수도 있고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함께 소멸된다는 유물론자, 물질주의자 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목숨을 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에 비로소 우리의 목숨은 참 생명이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가 없는 것이 있습니다.
생기가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전혀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은 듯이 살면서도 생기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직 시간에도 모이고 식사 시간에도 모이고 휴식 시간에도 모입니다.
그는 형제를 위해서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면서도 그 형제에게 언제나 생기 발랄하게 대해주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언제나 생기가 넘쳐 흐르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생기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