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제27주일 마르10,2-16 (성바// 마태19,3-12 서동성당// 241006 성바; 선부동성당// 250228 행운동성당)
오늘 복음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을 생각해보면 다섯 구성원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부모를 떠난 부부 그리고 그들로부터 태어난 어린이까지 입니다. 이 다섯 구성원은 인류의 가장 작은 단위 공동체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공동체의 원천인 가정공동체의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기초 공동체가 나아가는 목표가 어디이며, 어떻게 지속되고 성장하는지에 관하여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초 공동체는 만남과 떠남을 반복함으로써 지속되고 유지됩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으로 떠난것 처럼요. 결합과 분리// 합일과 갈라짐// 만남과 떠남은 창조질서 보존의 가장 근본이 되는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같은 세대끼리 결합은 가능하지만 같은 세대끼리 분리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만남은 가능하지만 떠남은 불가능하다는 불가해소의 원리입니다. 분리하고, 떠나고, 갈라서고 헤어지는 일은 언제까지나 그 다음세대에 속하는 자녀들의 몫이라는 얘기입니다. 이 원리를 거스르면 어떻게 됩니까??? 종양처럼 무한 번식의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같은 세대 끼리는 언제까지나 결합하는 존재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반대로 이 말의 이면에는 갈라서게 하는 일은 하느님의 몫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조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어서 이 원리를 거스르게 되면 죄를 짓는 것이고,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실은 오늘 복음은 10장 1절부터 시작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시는 장면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도착하신 유다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은 어떤 곳인지 생각해봅시다. 그곳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던 곳입니다. 그곳에 군중이 다시 그분께 모여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세례를 통하여 정결례를 몸소 치르셨으며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상징적인 표징에 가담하셨습니다. 그곳에는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가 함께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요구하는 전통적인 정결례도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요르단 건너편은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기 전에 도착하신 장소였습니다. 마르코복음 9장과 10장에서는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에서 - 다볼산 - 갈릴레아를 가로질러서 곧장 가파르나움으로 가신 뒤에 그곳을 떠나 유다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신 여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요르단 건너편은 이방인 지역/ 모압 벌판/ 도피성읍/ 아라비아 광야와 관련이 있는데 이는 모세가 신명기를 설명한 지역(신명1,5)/ 모세가 상속재산을 나눈 곳/입니다. 요르단 건너편은 모세가 신명기를 상세하게 설명한 후에 장차 차지하게 될 가나안 땅을 지파대로 나눈 장소입니다.
그 장소에 오늘 예수님께서 도착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율법을 설명하던 대로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가르치셨는데 무엇을 가르치셨습니까??? 먼저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렇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그러자 그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창조 때 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된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탈출한 뒤 시나이 광야에서 40년간 유랑생활을 했습니다. 그 때에 모세를 따르던 이스라엘은 무슨 일을 저질렀습니까??? 광야에서 우상을 섬겼지요. 바알신을 섬겼지요. 우상을 섬겼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방인 여인들과 혼인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혼인하여 40년을 같이 살았는데 이제 요르단 건너편에 이르러서 모세는 율법을 다시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너무 완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정 그렇다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한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하고 질문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런 점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의 의도를 아시고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사실 바리사이들이 질문했던 남편이 아내를 버린다는 "이혼"이라는 말은 "아폴뤼오"인데 아폴뤼오는 갈라서고 끈어버리고 내팽개친다는 의미보다는 "아포"(~로부터)// "뤼오"(편하게하다/ 구해내다/ 해제하다/ 속죄하다/ 보상하다/ 도움이 되다/ 이익을 주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그렇게 "구해내고/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이 맺어주신 혼인을 갈라놓을 만큼은 아니다라는 의미로 아주 단호하게 아내를 버려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혼인한 이는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며 둘을 갈라놓는 일은 하느님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한 몸이 둘로 갈라지는 일은 다음 세대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통하지 않고서는 갈라서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한몸을 둘로 갈라놓으신 분도, 둘을 한 몸으로 결합시키시는 분도 창조질서를 위해서 하느님이 주관 하시도록 내어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사람의 것은 사람에게 돌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한가정에 3대 4대가 모이는 일은 이제는 극히 드문 풍경이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이 새로운 가정을 꾸려나가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야만한다는 것은 부모님에게는 상실감이지만 동시에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부모들이 어린 손주들을 보면서 하늘나라를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에 관한 논쟁을 마치시자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는 장면을 연결지었습니다. 먼저 혼인이 지상에서의 천생연분에 관하여 말했다면, 어린이들을 축복하신는 장면에서는 천상에서의 천생연분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천상에서의 천생연분은 어린이끼리의 만남이 될 것입니다. 모두 어린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늘나라의 열쇠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다섯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기초 공동체가 나아가는 목표이자 목적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은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브루노) 성인 축일입니다. (프란치스코//브루노) 성인과 같이 성인들의 삶이 곧 어린이와 같은 사람의 삶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가난한 삶, 없이 사는 삶, 결합은 하되 분리가 되지 않는 삶, 이러한 모습은 또다른 의미에서 곧 바쳐진/희생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봉헌된 삶을 사는 사람이 곧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속성이 될 것입니다. 봉헌되었기에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으며, 만남은 있으되 종신토록 떠남이 없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봉헌생활을 하는 사람들, 수도자들과 성직자들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이들의 삶은 세상의 눈으로는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을 육성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이들은 세상에서 분리된 삶을 삶으로 인해서 영원히 어린이의 모습으로 남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에서는 시집가는 일도 장가드는 일도 없이 천사들과 같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이 걸으신 길을 묵상하며 어린이들처럼 기쁘고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