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제18주간 화요일 성비안네 마태14,22-36 예수님 바라기(대전협력)
오늘 복음은 두가지 장면에 머물며 묵상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첫째 장면에서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태워 먼저 떠나보내시게 하셨을까?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장면은 왜 제자들은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첫번째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먼저 배에태워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 이유가 뭘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서둘러 보내야만 했는가?입니다.
제자들을 먼저 보낼 것이 아니라 차라리 군중을 먼저 보낸 뒤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실 수도 있는데 왜 굳이 당신의 제자들을 먼저 보내셨는가?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군중들을 돌려보내는데에 제자들이 같이 있으면 안되는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이에 관해서는 요한 복음을 보면 군중을 돌려보내신 이유를 좀 다른 면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군중을 배불리 먹이셨을때에 그들은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한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때 군중들은 예수님이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군중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군중들의 이러한 모습을 반기며 기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뜻대로 예수님이 임금으로 추대되면 제자들 역시 임금님 곁에서 한자리씩 차지할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께서 장차 이루실 하늘나라의 구원 계획과 반대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먼저 제자들을 군중들로부터 떼어놓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군중을 먼저 떠나 보내지 않고 제자들을 먼저 보내신 이유는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제자들을 군중으로부터 멀리 떨어트려 놓음으로서 그들이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상반되는 일에 찬동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랬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먼저 건너가게 하신 것은 제자들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군중까지 돌려보내신 뒤에 예수님은 곧바로 제자들 곁으로 가지 않으시고 따로 산으로 물러 가시어 새벽이 되도록 기도에 전념하십니다.
이장면은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있었던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는 장면과 겹쳐지는 점이 있습니다.
그때 광야에서 사탄은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이렇게 유혹합니다.
"당신이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리고 이 장면을 루카복음사가는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갔던 유혹자인 사탄이 다시 돌아 올때에는 좀 더 교묘하게 알아 차리지 못하게 찾아온다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지만 제자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호수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그렇게해서 먼저 배를 타고 떠난 제자들은 어찌하여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헤어진지 얼마나 되었다고 몰라볼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호수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겁에질린 나머지 "유령이다"하며 두려워서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은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았을까요?
어찌하여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으로 보았을까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으로 본 이유를 몇 가지 들어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이 상식적이고 일반적으로 그들에게 다가오신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배를 타고 오시거나 정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육로로 가시려니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헤엄을 치고 오시면 믿을 수 있었겠지만 물위를 걸어오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얼마전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어 호숫가에서 군중들을 가르치실 때에만 해도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있고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 앉으셔서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신 것을 제자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자들이 물 위를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단번에 알아볼 수 있으려면
그때 호숫가에서 군중을 가르치실 때 물위에 서서 가르치셨더라면 가능했을 것입니다.
또는 거룻배를 준비하라 하시지 말고 직접 물위를 걸으시면서 혹은 물위에 서 계신채로 또는 자기부상 열차처럼 물위에 둥둥 떠서 가르쳤더라면 오늘 예수님을 못알아볼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때에 그랬더라면 오늘 그들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이 유령이 아니라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님이심을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은 평소때와는 다르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만큼 제자들의 상황이 절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이다!!" 며 알아보지 못한 다른 이유는 바람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이 타고 떠난 배는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저녁때부터 새벽이 되도록 노를 저었으나 몇 스타디온 밖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거센 바람은 자연현상이자 피조물의 움직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자연현상인 맞바람에 맞서 예수님께서도 바람을 몰고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몰고 오는 바람은 맞바람에 맞서는 바람으로서 이는 제자들이 나아가려고 하는 방향에서 본다면 순풍과 같은 바람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순풍을 몰고 제자들 가까이 오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확인하기 위해서 돌아다 봤을 때에 예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머리를 묶고 계시지 않았다면 아마도 유령처럼 보이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임을 확인한 뒤 물위를 걸어 가까스로 배를 탈출했으나 이내 거센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져서 물에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향하는 순간 이제는 순풍이 역풍이 된 셈입니다.
즉 예수님을 앞세우지 않는 한 우리들의 발걸음은 역풍의 또는 맞바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잘난척하며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향해서 걸어가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앞장서 가시도록 예수님의 자리를 내어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으로 본 더 근본적인 이유는 제자들의 눈이 아직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눈이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것은 믿음의 싹이 트이지 않았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나병환자를 고치실때부터/ 백인대장의 종과/ 베드로의 장모와/ 많은 병자들을 비롯하여/ 풍랑을 가라앉히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낳게 하시고/ 눈먼 두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의 말문을 열어주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손을 펴주시고/ 오천명을 먹이시는 등 수많은 표징을 보여주었지만 제자들에게는 아직도 예수님의 행적이 하느님의 권능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수 없었습니다.
아직 믿음의 싹이 움트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표징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 믿음이 약한자야, 왜 의심하였느냐?"하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호수를 걷다가 물에 빠져들게 된 것도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보다 피조물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풍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느끼지 못하고 거센 바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보다 피조물에 더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람이 아무리 거세게 불어도 바람으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순종하듯 그쳐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살이의 맞바람을 능가하는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며 오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피조물을 두려워하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믿음이 없는 것 만큼 공허한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간직하고 있다면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신앙생활에 활력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항상 잘못도 먼저하지만 뉘우치기도 먼저 하는 스타일인 듯 합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말할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혹시 주님이십니까?하고 귀를 기울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믿음, 겨자씨 만한 믿음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도 그 상황에서 의심은 들었지만 혹시 예수님이시냐고 물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곧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하며 예수님의 현존에 동참하고자 하였습니다.
믿음의 싹이 트이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호수를 건너가는 제자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부귀영화를 뒤로 한채 거센 풍랑이 몰아치는 호수를 건너가며 곧 다가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제자들의 삶과도 같습니다.
바람과 파도에 배가 뒤집힐 것만 같아서 이것 저것 가진 것 마저 모두 바다에 던저버렸습니다.
이젠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세상 풍랑을 헤쳐나가는데 필요한 노를 움켜쥔 채 굳어가는 맨주먹이 전부일 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제는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며 순간순간을 버티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앞만 보고 노를 저어가야 하지만 왠지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행여 예수님이 아주 크고 튼튼한 배를 몰고 와서 힘들고 지친 육신을 실어주실 것만 같기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바람대로 오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호수 위를 아무것도 타지 않으시고 빈 손으로 걸어오시는 분이십니다.
빈손으로 오시되 바람을 몰고 오십니다.
바람을 몰고 오시되 순풍을 몰고 오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풍파를 피하는 큰 배가 아니라 세상풍파 속에서 두려움을 없애주는 믿음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크고 안전한 배에 올라타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믿고 누구를 뱃머리에 앞세울 것인가?? 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큰배에 올라탓다고 하여도 예수님을 앞세우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작은 배를 타고 항해를 해야할 때라도 예수님이 앞장서 계시면 안전하고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의 바람은 이렇게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오늘 하루/ 이번 한 주간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셔들이고 믿음 속에 평화로울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 위와 물 아래가 없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중력을 벗어나면 된다. 중력을 벗어나면 물 위와 물 아래가 존재할 수 없다. 다만 물 안쪽과 물 바깥쪽만이 있을 뿐이다.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이기만 한다면 물 바깥쪽으로 나가게 되어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는 이치이다.
영혼에 무게가 있을까요? 있다면 영혼의 무게는 얼마나 나갈까요?
몇해 전 여름방학 때에 제주도로 도서선교를 갔는데 폭우가 솓아졌습니다.
몇달전 이모부가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 계실때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