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제18주일 요한6,24-35 생명의 빵 새인간(서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불평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
그들의 말대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간을 만나를 먹으며 버텼던 민족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말한대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로 배불렀을 때에는 주변 환경은 그야말로 삭막한 광야였습니다.
그 광야는 앉을 자리조차 없었습니다.
풀이라고는 찾아볼수도 없는 돌받이었을 뿐더러 마실 물도, 길어 올릴 샘도 없는 곳에서 그들은 만나를 먹었던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예수님이 오천명을 먹이신 곳은 빵과 물고기만 충분치 않았지 뭐든지 장만할 수 있는 풍족한 갈릴레아 호숫가였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은 그들이 광야에서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던 것입니다.
실재로 예수님이 물러가시어 즐겨 머물렀던 외딴 곳은 오늘날 지명으로 타브가라는 곳인데 그곳은 갈릴레아 호숫가였고, 또한 그곳에는 일곱개의 샘이 있었을 정도로 마실 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장작불이라도 지핀다면 언제라도 빵을 구울 수 있고, 또한 그들이 그물이라도 던진다면 언제든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준비된 군중들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오천명을 먹이셨으나 이를 표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빵은 배불리 먹었지만 그리고 12광주리에 가득차게 남았지만 그 일을 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좀처럼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가파르나움까지 따라와서 다시금 표징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가 하늘에서 내렸듯이 이제는 갓 구운 빵이 하늘에서 비처럼 솓아지게 해 보이라는 말과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대로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듯이 하늘에서 하느님의 빵이 내린다고 말씀하십니다.
(봄)비를 내리시어 땅을 적시고, 못자리에 씨가 뿌려지고, 자라면 옮겨심어 열매를 맺어 수확을 하고, 그 열매로 빵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이 모두 생략된 것입니다.
하늘에서 직접 빵이 내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빵이 내린다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이 물음 전에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만나에 관한 군중들의 생각입니다.
군중은 자기들의 조상들이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하였을 때에 시편 말씀대로 '그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는 것에 관하여 대단한 체험을 하였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즉 농사를 짓지 않아도 빵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봄비가 내리지 않아도, 그리고 못자리를 만들지 않아도, 또한 옮겨심을 넓은 농경지가 없어도, 빵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긍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기 위해서 하늘에서 내려와 생명을 주는 빵이 무슨 뜻인지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가 결코 참된 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만나를 먹으면서 불평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봄)비가 내리면 단지 그것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촉촉한 빗방울로만 받아들이는데서 만족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빵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봄)비를 내려주는 것은 하늘이 그 빗방울 한방울 한방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무언의 말씀을 하고 있음에 귀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빗방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슬처럼 작은 물방울 하나하나에도 그 속에는 하느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전해지고 있음을 들을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바오로는 에페소서에서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지난 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 .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4,22-24)
여기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말씀을 사도바오로는 새인간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즉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인 새인간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빵은 세상의 피조물이고 생명은 곧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곧 인간에 의해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만나가, 보리가, 밀이 빵으로 구워지듯이 피조물은 인간에 의해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특히 로마 8장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피조물들이 그들의 속삭임을 들어줄 인간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데, 그 인간이 바로 새인간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 .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8,19-23)
즉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순간이 바로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리는 생명의 빵으로 맞이하는 순간이 바로 하늘에서 빵이 내린다는 의미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실재로 생수를 양 쪽에 떠놓고 한 쪽에는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좋은 말로 칭찬해주고
다른 한 쪽에는 볼때마다 짜증납니다. 미워합니다. 싫어합니다. 아주 죽겠습니다. 하고 나쁜 말로 야단을 치면
좋은 말을 들었던 생수는 달고 부드럽게 변해서 향기가 나서 마시면 생명이 살아나고
나쁜말을 들었던 생수는 쓰고 고약한 악취가 나서 마실 수 없는 물이 되어 버린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피조물들은 인간의 상태에따라 탄식하기도 하고 찬미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변화야 말로 그 어떤 피조물의 표징보다 중대한 표징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새인간을 입은 사람은 모든 피조물을 멸망의 구렁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창조이래 지금까지 그분을 기다리며 다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듯이 우리자신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자녀인 새인간으로 변화되어 우리의 죽을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한 번 먹으면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빵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람은 빵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빵은 우리 육신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양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그런 정체불명의 빵/ 피조물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빵은 더이상 사람에게 생명을 가져다 줄 수 없음을 선포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육신은 곧 사라지고, 또 지금도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광야에서 만나가 생명의 빵이었지만, 그리고 그들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가 그들의 배를 불렸지만,
이제 그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만나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빵이자, 살이있는 빵.
배고프지 않는 빵이자,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느님의 참된 빵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빵은 분명 이시대의 중요한 양식임이 분명합니다.
그 빵은 아무리 먹어도 탈이 나지 않고, 또 한번 먹으면 영원히 배고프지 않으니 삼시세끼 때마다 계속해서 먹지 않아도 되는 생명의 빵입니다.
그것은 또한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 전해지는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의 빵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그리고 이번 한 주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살아있는 빵, 생명의 빵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