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제17주간 월요일 마태13,31-35 숨겨진 하늘나라(선한협력)
이른 봄 남새밭에서 나는 쑥갓은 허기진 배를 달래주는 향그로운 푸성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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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서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겨자씨의 특성이 곧 하늘나라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의 특성에 동의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먼저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고 하셨지만 실은 겨자씨보다도 더 작은 씨앗이 있습니다.
실재로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은 난(난초) 씨앗이라고합니다.
그리고 겨자씨가 자라면 그 어떤 풀보다도 커져서 나무가 되고 그 가지에 새들이 와서 깃들인다고 하셨지만
실은 겨자가 아무리 자라도 나무라고 부를 만큼 단단하거나 크게 되지도 않을 뿐들어 하늘의 새들이 와서 깃들이고 둥지를 틀만큼 가지들이 수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보다 더작은 씨앗이 있고,
또 겨자보다 더 등한 다른 식물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겨자씨를 하늘나라에 비유한 것일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먼저 겨자씨의 빠른 성장력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겨자는 파종하고나면 잡초보다 더 빠르게 성장한다고 합니다.
즉 가라지보다 더 빠르게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을 맬 필요가 없는겁니다.
즉 가라지를 능가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바로 전에 가라지의 비유가 나오는데 가라지는 밀과 비슷하게 보이도록 적당히 자라나는 것이 가라지의 특성이엇습니다.
하지만 겨자는 다른 어떤 식물들보다 빠르게 성장해서 싹이 트고, 또한 자라기 시작하면 다른 잡풀들은 그성장을 따라잡지 못한다고 합니다.
특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때가 오면 웃자라게 되는데 웃자라는 속도는 평소보다 훨씬 빨라서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어느새 하늘로 솟아올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예수님 보시기에 복음이 전파되는 모습과 흡사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겨자씨를 하늘나라에 비유하신 이유로는 겨자는 파스카 절기에 맞춰서 꽃을 피우는 식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갹해봅니다.
겨자씨는 이스라엘에서 2월부터 4월 사이에 자라고 꽃이 피는데 유채와 비슷해서 노란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노란 꽃이 갈릴레아 호수주변에 넘실거리게되면 파스카를 갈망하는 이들의 마음이 희망으로 부풀어 오르도록 부추기기 때문에
다른 어떤 유수한 식물보다 겨자씨를 하늘나라에 비유하신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렇게 본다면 누룩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나라는 누룩처럼 빠르게 팽창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당신이 이렇듯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세상창조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창조때부터 무엇을 숨겨두셨길래 이처럼 여러가지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그 비유속에 하늘나라가 숨겨져 있다고 하실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두가지를 드러내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자연만물의 생성원리를 통해서 드러나는 생명의 잉태와 탄생의 신비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두번째는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말씀의 잉태와 탄생의 신비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에서 이 말씀의 잉태와 탄생의 신비에 관하여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네"
즉 세상 창조때부터 숨겨두신 것은 우리가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라는 것입니다.
특히 말씀으로 잉태하시어 수확한 "말씀의 첫열매"가 바로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상의 원리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속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태초에 정하신 뜻안에서 우리는 오늘도 새롭게 잉태되고 또다시 탄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시편110,3 에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빛속에 네가 나던날 주권이 너에게 있었으니// 샛별이 돋기전에 이슬처럼 내 너를 낳았노라 하시리라"(성무일도 1주간제2저녁기도)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자기밭에 그 말씀의 씨앗을 기꺼이 뿌릴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은 김영희잼마루시 수녀님의 선교지에서 읽는 바오로서간 일곱번째 편지로 소개된 글입니다.
세상창조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시려는 하느님의 신비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잘 설명해주는 글이기에 참고자료로 발췌해 둡니다.
<< 신음하는 우주에서 핑의 마음으로 >>
네팔은 웅장한 히말라야 설봉 때문만이 아니라 희귀한 동식물을 관찰하러 오는 외국인으로 붐비는 곳이지만, 두 번의 대지진 이후 외국인의 발길이 뚝 끊어졌습니다. 네팔의 국토는 지구상의 0.1%에 지나지 않지만, 생물계의 다양성이 매우 잘 보존되어 있어 온 세상 꽃의 2%와 조류의 8%, 지상 포유류의 4%가 살고 있는 생태계의 보고입니다. 이러한 생태계의 놀랄만한 다양성은 긴 고구마 모양의 지형에 열대 온대 냉대가 공존하는 특이한 지형적 위치와 고도, 그리고 기후의 변화에서 기인합니다.
다양하고 아름다운 자연에서 살아온 네팔인은 자연과 깊이 교감합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어지는 다양한 축제도 자연에 대한 외경과 감사, 자연재해로부터 보호받기를 갈망하는 종교심의 표현인 것 같습니다. 10월이 되면 네팔인의 가장 큰 축제인 '더사인(Dashain)'이 시작됩니다. 이때 높게 잘 자란 대나무를 질긴 밧줄로 엮어 7-8미터 높이의 그네를 만들고 더사인부터 티하르 축제까지 온 공동체가 함께 그네타기를 즐깁니다.
네팔어로 '핑'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 그네는 단순한 놀이기구가 아닙니다. '핑'은 네팔의 문화와 전통, 공동체 정신, 무엇보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그들의 마음을 잘 드러냅니다. 그네를 타면서 네팔인들은 적어도 1년에 한 번 발을 높이 띄워 땅을 딛지 않음으로써 세상 근심에서 자유로워지고, 잠시라도 땅을 가볍게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받치며 말없이 수고해 주는 땅을 한 순간이라도 가볍게 해 주고 자신도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인 것입니다. 이렇듯 자연에 대해 애틋한 마음을 지닌 네팔인이 지진이라는 자연재해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번 지진으로 8천명 이상이 사망하고 1만 4천명 이상이 다쳤으며, 수많은 임산부가 태아를 잃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두번의 지진 때에도 꽃을 피웠던 나무들은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간간이 발생하는 여진이 지구의 신음처럼 들리니 꽃과 나무도 편할 날이 없는 것 같습니다.
네팔의 지진만이 아니라 지구 곳곳에서 발생하는 대형 자연재해와 기상이변, 알 수 없는 전염병 등으로 인간뿐 아니라 동식물도 죽음과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생물종이 지구에서 사라져가며, 풍성하고 아름다웠던 숲과 호수와 들판이 황량한 사막으로 빠르게 변해가고 자체 정화 능력을 상실해 가면서 생명의 터전인 지구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더불어 세계 곳곳의 전쟁과 불화로 온 지구가 신음합니다. 평화로운 날이 없는 오늘, 그래서 더욱 구원을 갈망하게 됩니다.
창세기와 시편은, 창조된 자연과 세상이 거룩한 하느님의 구원 드라마가 연출되는 무대이고 인간은 이를 돌보며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알립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인간과 함께 모든 자연이 하느님을 직관하고 그분의 구원 안에 있음을 보여주십니다(마태13,1-8.24-32; 마르4,1-8.26-32). 바오로도 하느님의 구원을 인간 공동체와 자연 세계를 포괄하는 우주적 구원의 완성자이며, 인간은 그 안에서 모든 피조물과 함께 구원을 향해 있다고 선포합니다(1코린8,6; 콜로1,15-20; 필리2,9-10). 특히 로마 8장에서는 오늘날 지구라는 몸 전체가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음을 암시하면서 온 우주의 구원을 위한 인간의 사명을 밝힙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 .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8,19-23)
인간에게 일어나는 하느님의 구원은 노예 상태에서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의 우주적 구원을 내포하므로 인간의 구원이야말로 모든 피조물에게 동경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모든 피조물도 인간과 함께 고통을 겪어 신음하지만, 그러한 고통은 절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들" 이 나타나면 새로운 기쁨이 될 일종의 산고와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두 번이나 엄급되는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연의 회복, 피조물의 구원을 위한 인간의 역할을 의미합니다. 곧 믿음에 의한 의화, 그리스도의 구원은 인간의 새로운 상태, 새 창조를 가져오며, 이 상태는 온 우주로 확장되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이는 자신만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화해와 새 창조의 은총이 이웃과 사회와 인류, 그리고 온 우주에 스며들어 모든 것을 새롭게 되도록 하느님께 불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예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 .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2코린5,17.19-20).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한 프로그램과 세계평화를 위한 노력이 충실히 실천되어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오로에 의하면 먼저 믿음으로 의화된 사람들이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필리2,15), 온전히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지구가 계속되도록 이를 잘 돌보고 또 많은 것이 변화되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간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 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5,5) 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새로운 땅은 오로지 자아에게서 진정 자유롭고 한없이 가볍게 된 온유하고 겸손한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의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모든 피조물의 신음에 함께하는 마음, 땅을 배려하는 '핑'의 마음으로 겸손하게 살아갈 때, 우주와 함께 해방된 "하느님 자녀들"의 새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성서와함께,473권, 2015년 8월호, 22-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