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나해 연중제 16주간 수요일 마리아막달레나기념 요한20,1-2.11-18 통합적생태학(성바)

jasunthoma 2015. 7. 25. 02:10

어제 명동 서울대교구청 신관 강당에서 교황님의 생태회칙과 우주이야기라는 주제로 강연이 있었습니다.

생태 사상가인 메리 에블린 터커와 존 그림 교수 부부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생태회칙 "찬미를 받으소서"와 우주이야기를 함께 아우르면서 강연을 해주셨습니다.

먼저 교황님의 회칙인 "찬미를 받으소서"의 파급효과에 관해서 짧막하게 언급하면서 이 회칙은 종교와 과학 사이의 대화의 풍경을 바꿔놓는 변화를 가져다 줄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그리고 교황님이 회칙에서 사용되는 언어 중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통합적 생태학이라고 했습니다.

이 통합적 생태학은 인간이 자연세계 안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파뭍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통합적 생태학이라고 할 때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 세가지는 평등, 생태, 경재라고 합니다.

통합적 생태학에서 평등을 얘기할 때에는 인간의 다양한 계층 사이에 공평한 분배에 대한 고려없이 생태 환경에 대해 이해를 하고 숙고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다.

그래서 평등이라는 것이 분배에 초점을 두는 것이라면 경재는 부에 초점을 두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 사회에서 분배의 간극이 크다면 우리가 평등한 경재를 공유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태학에 있어서 도덕적 힘에 관해서 말할 때에 우리 인간은 자연 속에 파뭍혀 있는 그런 존재이고 그래서 우리가 자연을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황님의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가 12억가톨릭 신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20억 그리스도교인들을 고무시키고 그리고 더 나아가 종교를 가지지 않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한 회칙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특히 과학자들이 교황님의 이 회칙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지구의 미래는 우주의 여정과 함께 하게 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회칙이 인류공동체 전체에 메시지를 전했다는데에 의미가 있다고 하면서 끝으로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합니다.

"인간은 우주라고 부르는 전체의 일부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의해 재한된 부분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다른 것과 분리된 무엇인가로 경험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 의식에서 일어난 일종의 과학적 망상이다. 이 망상은 우리에게 일종의 암흑과 같은 것이어서 우리 개인적인 욕망과 우리에게 가까운 몇 사람들에게만 연민을 느끼게 제한한다. 우리의 과학은 우리의 연민의 서클을 더 넓혀 나가고 자연전체를 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질의 응답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특이할 만한 것은 인류의 사회정의는 창조질서 보존 뒤에 온다는 것입니다.

즉 비폭력과 평화는 건강한 생태계 안에서 구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을 외쳤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가 토마스 베리의 글을 읽으면서 가난한 자를 위한 외침에서 지구를 위한 외침으로 변화된 것도 사회정의가 통합 생태학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생태론과 우주론과 정의는 하나다라는 것입니다. 

끝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실천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통합생태학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조금 접어두고 지구(생태)가 이야기 할 수 있도록 열어놓자라고 했습니다.

즉 지구가 들려주는 이야기, 우주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권고합니다.

에고ego의 모난 부분을 밀쳐두면 에코eco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댜면 통합적 생태학에 비춰서 오늘 복음을 잠시 묵상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잠시 머물러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제자들과 무덤 사이를 왔다갔다 합니다.

제자들이 머물던 다락방은 그들의 요람이었고, 예수님이 뭍히신 곳은 무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왔다갔다 한 셈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요람에서 무덤 사이를 왕래하며 시작과 마침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 즉 교량 역할을 한다는 것은 마리아가 종교와 생태가 만날 수 있도록 조율하는 콘트롤 타워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에 비길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해봅니다.

물론 그 콘트롤 타워를 책임지고 움직이시는 분은 예수님이 십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위치는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삶과 죽음을 통합하는 우주적 중립에 위치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주적 중립은 결코 삶과 죽음을 갈라 놓지 않으며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지 않는 통합적 생태학의 영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두가지 모습으로 중립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한 중립이고 다른 하나는 악한 중립입니다.

선한 중립은 오늘 막달라마리아가 하듯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상호 통합을 이끌어 내는 중립입니다.

이러한 영성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모두 치유해서 통합적 생태영성으로 모두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 막달레나 공동체~~~

 

반면에 악한 중립은 경제가 그 중심에서 서로를 분리시키는 중립입니다.

즉 이사람에게는 창을 주고 저 사람에게는 방패를 주면서 상해보험에 가입하도록어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간에서 싸움을 부추겨서 피해 배상을 해주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고통앞에 중립은 없다" 하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러한 악의 중립에 기울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제가 주님을 모셔가겠습니다" 하고 주님만을 자신의 중심에 두려고 했습니다.

오늘 하루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지가 아니라 누구를 찾고 있는지에 더 머물러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