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제14주간 월요일 마태9,18-26 빛나는 헌옷(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구원해주십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이 구원되는 조건은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것' 이었다고 볼 수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여인은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면 구원을 받겠지. . 하고 생각하였던 것일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과감하게 손을 잡을 수도 있고 귀를 잡거나 에수님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 말입니다.
아니면 예수님께 정중하게 "잡아도 되겠습니까??" 하고 부탁을 드릴 수도 있었을 텐테. . 여인은 그러한 방법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옷자락 술에 슬쩍 손을 대어봤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과연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집중할 수밖에없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 이전에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실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찾아와서 항의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해명하시면서 당신은 새신랑이며 혼인잔치의 손님들은 단식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그리고 두가지 더 비유를 들어 해명하시는데 새옷과 헌옷에 관한 비유과 새술과 헌가죽부대에 관한 것입니다.
아무도 새천조각을 헌옷에 대고 궤매지 않고 새술을 헌가죽부대에 담지 않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해명이었습니다.
당신을 일컬어 새천조각과 새술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잔치음식을 드실 때에 입고 계셨던 옷이 새옷이었을까?? 헌옷이었을까?? 하고 이어서 생각해봅니다.
분명히 헌옷을 입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것도 헤지고 구멍난 옷이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새옷을 입고 계셨더라면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만을 문제삼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새옷만 입고 다닙니까??? 하고 싸잡아서 문제삼았을 것입니다.
옷에 관한한 세례자 요한만큼 엄격하게 가르치는 인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헌옷을 입고 당신을 일컬어 새천조각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말은 당신이 입고있는 헤지고 구멍난 헌옷을 꿰매서 입을 수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당신은 새천조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새것이 헤지고 구멍날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헤지고 구멍날정도면 그옷감은 이미 낡은 옷감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모습은 헌 옷 속에 새천조각이 꿰매지 않은 상태로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러한 옷을 입고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여인은 눈여겨 보았던 것입니다.
새옷을 입어야만 눈부신 것은 아닙니다.
헌 옷을 입어도 눈부신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눈부시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저는 헌옷을 입으면 눈부시지 않은 스타일입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제 옷들은 모두 나일론(폴리에스테르) 원단입니다.
그 옷들은 웬만해서는 헤지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새옷같은 느낌입니다.
끝으로 오늘 화답송에서 노래하는 시편 91편이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서 읽어보겠습니다.
"당신의 날개로 덮어 주시고 그 깃 아래 숨겨 주시리라/
그의 진실하심이 너의 갑옷이 되고 방패가 되신다/
밤에 덮치는 무서운 손, 낮에 날아드는 화살을 두려워말아라"(공동번역 시편9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