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제9주간 토요일 복되신동정마리아신심미사 루카1,39-47 늙지않는 미소(스승)
오늘 복음에서는 두 여인의 만남에 관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만남은 단순히 늙은이와 젊은이의 만남으로만 바라볼 수만은 없습니다.
아이를 잉태해서는 안되는 마리아와 아이를 잉태할 수 없었던 엘리사벳의 만남이었고
세대와 세대 간의 만남이자 한 세기와 또 다른 세기와의 만남입니다.
구약의 완성과 신약의 시작을 알리는 중대한 만남입니다.
이 만남을 통해서 우리의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알려주는 만남입니다.
그런데 이 만남은 또한
허물없는 만남이자 위아래의 격식이 없는 만남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었을 때에 그는 성령으로 가득차 마리아를 "내 주님의 어머니"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
이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과 같은 고백입니다.
또한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한 고백이지만
오늘 엘리사벳이 그 늙은 나이에 마리아에게 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늙은이가 젊은이에게 "내 주님의 어머니"라고 청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분은 어머니가 아니라 아기입니다.
아기가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두 여인의 만남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기가 주인이 되지 않고서는 그어떤 신체적 장애도 윤리적 장애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평소에 수도자들을 만나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 중에 하나가 수녀님들에게 "고약한 노처녀가 되면 곤란하다"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물론 사제들에게도 "고약한 노총각이 되면 곤란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고약하다는 것은 기쁨이 없는 사람을 일컷는다고 생각합니다.
자존심으로 가득찬 사람은 기쁨이 없으며 스스로를 고약하게 만든다는 것을 우리는 주위로부터 숫하게 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엘리사벳을 보면 어떻게 늙은이가 저토록 순한 어린양처럼 기뻐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세월이 흐르면 우리의 육신과 얼굴은 늙어갑니다.
하지만 기뻐하는 사람의 얼굴은 결코 늙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소는 세월이 지나도 늙지 않습니다. 오히려 늙을 수록 미소는 더 빛을 발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잉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내 뜻대로 해결해서 찾아오는 기쁨은 고약한 기쁨입니다.
자존심과 체면이 주인행세를 하기때문입니다.
반면에 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에 오히려 이를 받아들이고 맞이하여 찾아 오는 기쁨은 바보같은 기쁨입니다.
하지만 쓴 웃음이 아니라 바보같은 미소가 더욱 아름답습니다.
바보가 아니라 바보같은 미소는 말씀을 주인으로 잉태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희망이고 기쁨의 성모님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말씀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미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희망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안에서 오늘 하루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