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제8주간 수요일 마르10,32-45 풍성한 가난(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세번째 예고 하십니다.
하지만 성령강림 이후 제자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 아니라 가난한 삶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밝히고 있듯이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 . . 그러는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사도4,32-35)
여기서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라는 사도행전의 말은 때론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궁핍하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서 모두가 궁핍해 졌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그렇게 된 그들중에 두 제자가 이렇게 요청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랐으니 장차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자리라도 차지하게 해주십시오'
꿩대신 닭이라도 잡겠다는 겁니다.
그런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닭도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자리는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이 백성위에 군림하기 위해 차지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최후의 선택은 명예마저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난을 선택함으로써 명예롭게 된다면 그것까지도 버리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희망을 주려하지 않고 기를 팍 팍 꺽어 놓는 말씀을 하실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첫째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째된다"는 말씀이 이를 잘 설명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모순율->황금율로 변화됨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첫째를 못마땅히 여겨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꼴찌를 사랑해서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째든 꼴찌든 모두 받아들일 만한 합당하고 타당한 모습이 바로 "첫째가 꼴지되고 꼴지가 첫째된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공평하고 평등하다고 할 때 흔히 높고 낮음이 없이 모두가 일정한 위치에 있는 상태를 평등한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책상높이는 다 일정할지 몰라도 사람은 어느누구도 일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첫째가 꼴지가 되지 않는다면 또는 꼴찌가 첫째가 되지 않고서는 인간세상에서 만큼은 결코 평등이라는 합의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첫째가 누리던 그 날수만큼 그만큼 꼴찌가 첫째가 될때에 비로소 모두가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각자에게 던져진 질문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되 이러한 일을 잘 참아 받아들일 수 있냐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그러한 삶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면 그것은 오늘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라고 물으신 예수님의 질문에 새로운 응답을 드릴 수 있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풍성한 가난의 신비를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