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부활제7주간 목요일 요한17,20-26 로고스 하느님 이름(성바/스승)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었고 또 앞으로도 알려주겠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어디를 봐도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신 적이 없으신데 어찌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하고 생각해봅니다.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어본에서 아버지“Πάτερ파테르”는 14차례 나오는데 그 중에 요한복음에서 세차례 언급되고 있습니다. 요한11,41에서 라자로를 살리실 때에 한차례 아버지를 부르십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17장 1절에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는 첫 구절에 아버지를 부르십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어지는 기도 마지막 부분 오늘 복음 본문 17장 25절에서 아버지를 부르십니다.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부르셨던 "아빠(Abba)"도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아빠와 아버지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를 지칭하는 대명사를 포함해서 300여차례 사용되는데 복음서 중에서 아버지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복음은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176회)에서 사용하는 아버지는 나머지 세 복음서(마태72회/마르20회/루카68회)를 합한 것보다 더 많습니다. 그런 반면에 이름이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자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이름“ὄνομά오노마”는 14차례 사용되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15,21과 오늘 복음 본문 17,26에서 단 두차례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이 이름이라는 단어 두차례는 모두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는데 오늘 복음 본문에서 사용된 오노마는 예수님이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하실 때에 사용하셨기 때문에 아버지 이름에 해당하는 파테르 오노마로 사용하셨고 15장 21절에서 사용하신 오노마는 제자들에게 참포도나무 비유를 들어서 이야기 하실 때에 당신 자신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었다는 말은 곧 하느님의 이름을 드러내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하느님의 이름을 개인적으로 함부로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유다인들이 말하는 '우리의 하느님'이 바로 그분이시라고만 하셨습니다.구약에서 모세에게 알려주셨던 그 야훼 하느님이십니다. '나는 있는 나다' 혹은 '엘로힘' 또는 '아도나이'라고 불렀던 그 하느님이십니다. 돌판에는 새길 수 있었지만 부를 수는 없었던 그 하느님이십니다. 침묵의 하느님이십니다. 구약에서는 거룩하신 하느님을 속된 인간의 입으로 직접 부를 수 없어서 돌판에 새겼습니다. 돌판에 새겼다는 말은 글자/문자의 하느님을 의미합니다. 즉 문자화 시켰다는 말은 공간속의 하느님을 뜻합니다. 어느 특정한 장소에 계시는 하느님을 말합니다. 거룩한 장소, 거룩한 공동체, 분리된 장소, 봉쇄되거나 지정된 장소에 거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문자화 시켜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만의 하느님으로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달라졌습니다. 요한복음 첫 구절에서 보듯이 예수님이 부르신 하느님은 침묵하지 않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말하는 하느님은 곧 말씀의 하느님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이름도 말씀(로고스)이 되는 것입니다. 로고스는 신약본문에서 68차례 사용되었습니다 그중 복음에서만 25차례 사용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7차례, 공관복음에서 8차례 즉 로고스, 말씀의 하느님이라는 것은 시간속의 하느님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시간 속에서 인류의 역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무엇이 참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뒤섞어 놓기를 일삼았습니다. 구약에서 하느님께서는 인류가 하나가 되어 바벨 탑을 쌓는 것을 보시고 온 세상의 말을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던 분이 구약의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한 처음 말씀이 계셨고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말씀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밝혀 놓으셨습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말이 뒤섞여 갈라졌던 인류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천지 창조 이전부터 쓰던 그 말씀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를 호칭할 때에 "야! 하고 부르면 지나가던 모든 사람은 쳐다봅니다. 살아있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담벼락에 아무리 큰 글자로 자기 이름이 써있어도 외면해버립니다. 그것은 이미 죽은 이름이며, 글자만 같지 나 자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자신을 지칭하는 이름은 문자, 글자가 아니라 호명하는 그 자체 말씀으로 그 사람이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흩어졌던 사람을 모아들이시어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은 말씀이십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어 서로 일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