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사순제3주간 토요일 루카18,9-14 내적 회개(딸)
고해성사의 두가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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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두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즉 두가지 유형의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하늘을 우러러 하늘위에 계시는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반면 세리는 고개를 숙인채 가슴을 치며 속삭이듯 성전속에 계신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기도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사회비판적인 기도를 하였음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찍이 서서 고개를 숙인채 가슴을 치며 자기 비판적인 기도를 하였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리사이의 기도 모습입니다.
오늘 바리사이가 드린 기도는 죄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욕심많은 사람/ 정직하지 못한 사람/ 음탕한 사람/ 세리와 같은 사람
그런데 이러한 사회고발적인 내용은 궂이 성전에서 드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전은 판결하는 장소가 아니라 기도안에서 일치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역이 되어야할 성전에서 죄인이 보호받는 것을 바리사이는 원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하느님 앞에 떳떳하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바리사이가 그러한 대의적인 기도를 드린 목적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 목적은 그러니까 자기 정당화를 위함입니다.
그들 뒤에 숨어있는 목적을 성취시키려고 의도적으로 이웃의 잘못을 들추어 낸다는 점입니다.
그 가 바라보는 이웃의 잘못은 잘못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웃의 잘 못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개인의 죄로 볼 수도 있고 궂은 일을 도맡아 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죄로 볼 수 도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선을 긋고 정의롭고 정당하게 살아가면서 내가 그쪽으로 가려고 해도 갈 수가 없고 네가 이쪽으로 오려고 해도 올 수가 없다고 판결을 내리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를 갈라놓을 깊고 넓은 강은 이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갈라놓을 깊고도 넓은 강은 죽은 다음에 하느님께서 마련하시기 때문입니다.
수도자 성직자들이 발에 흙 뭍히는 것을 두려워하는 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 수는 있어도 결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머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늘 하루 남의 탓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보기를 바라십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사람이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회개로 의로워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남을 고발하려는 자는 먼저 자신을 스스로 고발하여 은총의 사순시기를 완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