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사순제3주간 금요일 마르12,28ㄴ-34 경청하는 사랑(제주협력)
며칠전에 연피정을 했습니다.
피정하는 동안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태워야 했습니다.
~~~~생명이신 하느님 제 생명을 지극히 순결하신 당신의 생명으로 바꾸어주소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 계명으로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여라'고 일러주십니다.
즉 하나 뿐이신 하느님을 사랑하여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한가지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들어라 이스라엘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계명을 지키기 전에 먼저 듣기를 바라십니다.
들어라는 히브리어로 쉐마라고 합니다.
쉐마 이스라엘이니까 들어라 이스라엘아가 됩니다.
유다인 자녀들은 태어나서 말을 배우기 이전에 이 말을 듣는다고 합니다.
어머니 무릎에 뉘어 가장 먼저 이 단어를 배운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먼저 '쉐마'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쉐~마~~~
그리고 아이가 잠들기 전에도 이 말을 들려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알기 전에 그리고 어머니를 알기 전에 쉐마 이스라엘 부터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쉐마 이스라엘 이라는 말을 통해서 하느님이 너를 사랑하시고 어머니가 너를 사랑하고 있단다 라는 의미를 무의식중에 습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어머니들은 아이를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들은 자랄 때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까?
우리 어머니들은 아이가 눈만뜨면 "안된다" "하지마라" 는 경고하는 말이 대부분인것 같습니다.
그 말을 하기 전에 "때찌" "야", "애", "아이" 를 외친다음에 하지 못하게 타이르거나 안되는 것임을 주지 시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이에게는 계명이 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이의 행동에 제제를 가하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들으면서 자란 아이는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저는 저를 보면서 절실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행위에대한 통제를 많이 받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혹시 사람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장 잘 듣는지 아시는지요?
의사가 환자를 진찰 할 때에 청진기를 꼿고 환자의 몸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듣습니다.
환자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입니다.
즉 귀를 넓히고 귀를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귀가 크다고 잘 듣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귀가 크다고 귀가 밝은 것도 아니고 귀가 밝다고 잘 듣는 것도 아닙니다.
귀가 밝은 것 하고 잘 듣는 것 하고는 다릅니다.
물론 귀가 밝으면 멀리서 말하는 것도 알아듣고 무슨 말인지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말은 아무리 가까이서 들어도 한쪽귀로 흘려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똑 같이 듣더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냐 없냐에 따라서 잘 듣는 사람이 되든지 그렇지 못한 사람이 되든지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전해주는 첫째 계명은 사랑의 속삭임과도 같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귀를 기울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의 말은 크게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속삭이기만 해도 크게 들립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하느님 말씀을 가장 잘 듣는 사람이고 또 그런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사랑으로 속삭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십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다/ 하느님 곁에 있다는 말은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했던 말입니다.
즉 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회개의 세례를 받는 것이 훨씬 더 하느님 나라에 가깝다는 의미로 했던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율법학자에게 하신 너는 하늘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는 말은 율법계명을 잘 알고 지키기는 하지만 아직 회개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 안타까움을 드러내신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명을 지키는 것에 앞서 그리고 회개하는 것에 앞서 무엇보다 경청하는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듣는 것/ 들을 수 있을 때에 우리는 하느님께 더욱 가깝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가장 잘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보다 더 잘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내안에 모신 예수님을 잘 형성시켜 나갈 때에 내안에 계신 하느님을 세상에 내어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앞서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듯이 이웃에게 귀를 기울여 그 안에서 우리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