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나해 연중제4주간 수요일 마르6,1-6 믿음으로 마무리(성바)

jasunthoma 2015. 2. 4. 05:30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놀라는 장면이 두번 나옵니다.

먼저 사람들이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하며 놀란 것은 그들이 평소에 생각했던 예수님과 다른 모습의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저사람은 목수가 아닌가?' 에서처럼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의 직업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목수의 아들'이라고 불렀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아예 '목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 눈에는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일보다 목수 일을 할 때의 그사람의 모습이 훤히 떠오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까 고향사람들의 놀라움은 겉으로 드러나는 예수님의 행위에 대한 놀라움이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놀라움은 그들이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는데에 대한 불신에 대한 놀라움입니다.

예수님이 고향사람들에게 놀라신 것은 고향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의심스러움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말하자면 예수님이 놀라신 이유는 당신이 회당에서 가르치시는데 많은 이가 그 가르침을 듣고서는 놀라면서도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카파르나움과 코라진과 베사이다에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놀랐겠지만 그래도 그곳에서는 많은 기적들을 일으키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자라신 고향에서는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음을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렇다면 고향사람들의 놀라움과 예수님의 놀라움은 처음부터 시작되는 그 근원이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놀라움은 처음부터 놀라면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그들의 놀라움은 먼저 놀란 다음에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여 거부감이 드는 놀라움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놀라지 않으십니다.

먼저 놀라지 안으시고 사람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애쓰고 안쓰러워하고 측은해 한 다음에 결과적으로 그들의 믿음이 없다는데에 대한 놀라움이 아닐까? 합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놀라움이 믿음으로 마무리 될 수 있는 하루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