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대림제3주간 화요일 마태21,28-32 생명의 나눔(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드려주십니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습니다.
이어서 아버지는 또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와 두 아들의 대화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공개적인 대화가 아니라 비밀스런 대화를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두 아들을 불러놓고 공개석상에서 분부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각각 따로 가서 말하였던 것입니다.
아들을 불러들여서 말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가서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서 말할 때에도 소리내어 말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의중을 알아들은 두 아들도 또한 소리내어 대답하지 않고 다만 속다짐내지 결심의 표정을 지어보이며
'싫습니다' 또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본인의 의사를 암묵적으로 표현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고
다른 아들은 처음에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남들이 들으면 안되기라도 할까봐 아버지가 직접 아들에게 찾아가서 긴히 부탁하고
아들들 또한 속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드러나지 않게 속다짐으로 대신 의사표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오늘 복음만을 보게되면 일상 중에 일어날 수 있는 단순한 이야기일뿐입니다.
왜냐하면 큰아들은 처음에는 아버지 뜻을 거역하는 죄를 지었으나 나중에는 회개하여 아버지뜻을 실천하는 바람직한 아들이 되고
다른아들은 처음에는 아버지 뜻을 받들었으나 나중에는 그 뜻을 거역하여 죄를 짓는 못된 아들이 되는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과 이어지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이야기와 연결해서 보면 상황이 좀 달라지게 됩니다.
흔하게 일어나는 일상생활이 아니라 일생 일대에 단 한번 있을지' 혹은 없을 수도 있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해야하는 중대한 일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의 상황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다놓고 호령하며 소리내어 부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가 부탁한 포도밭을 간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인 곳으로 가야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두 아들이 가게될 포도밭에는 생명을 더해주는 달콤하고 시원한 포도주 잔이 있는 곳이 아니라
아주 씁쓸하고 독한 죽음의 잔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따라나선 죄인들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맏아들이 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인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일하러 갔습니다.
처음에는 '싫습니다' 즉 죽기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나 나중에는 생각을 바꾸어 포도밭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은 자들인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맏아들과는 달리 결심한 뒤에 '아버지!'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자신의 거짓결심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기 위해서 '아버지!'라는 호칭을 덧붙였던 것입니다.
아무튼 말을 길게 하거나 무엇을 덧붙인다는 것은 나는 말만하고 실천하지 않겠다는 실천과도 같은 것이니
저도 가급적이면 그런 실천은 하지 않기기 위해서라도 강론을 짧게 하도록 노력할까합니다.
오늘하루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생명을 나누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04/12/14 마태21,28-32
콩쥐와 팥쥐에서 계모와 팥쥐는 착한고 어진 콩쥐를 학대하고 괴롭히지만
선녀의 도움을 받아 결혼한다.
그러나 심술궂은 팥쥐와 계모의 흉계에 콩쥐는 연못에 빠져 죽는다.
누구나 콩쥐와 같이 어질고 선한 마음이 있는 반면
팥쥐와 같이 시기하고 열등감이 식을 줄 모르는 악한 마음이 공존하는 것 같다.
잘못을 저질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나간 아들은
다리에 묶인 한올의 실을 끊고 하늘로 날아 오르는 새와도 같다고 생각된다.
아무리 실이 가늘어도 끊어지지 않는다면 날아 오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실이 아니라 굵은 밧줄로 묶여 있다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믿지 않는 율법학자와 대사제들이 그렇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