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나해 대림제2주일 마르1,1-8 시간 도둑(성바)

jasunthoma 2014. 12. 7. 05:27

오늘은 대림제2주일이자 성암브로시오 주교학자 축일이기도 하고 한국교회에서는 인권주일이자 사회교리주간으로 지내는 날입니다.

여러 의미있는 날들이 겹쳐지기는 했지만 대림2주일의 의미만큼은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난 주(대림1주일)의 메시지는 "깨어있으라(마음)" // 대림제2주일의 메시지는 "준비하여라(길)"// 

대림3주일 메시지는 "베풀어라(세례)" // 대림4주일의 메시지는 "기뻐하여라(생명)" 로 볼 수 있습니다.

주일복음의 전례주기는 3년 주기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해당하는 마르코복음의 시작은 항상 둘째해인 나해 대림제2주일 복음으로 정해져있습니다.

이는 마르코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나타나 주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첫째해인 가해는 마태오복음으로(마태3,1-12) 세례자 요한의 시작을 알리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부분이고

셋째해인 다해는 루카복음의(루카3,1-6) 시작을 알리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부분이 대림제2주일 복음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세 복음서가 겹쳐지면서 공통적으로 전해고자하는 복음 내용은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로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와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입니다.

즉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듣거든 지체하지 말고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데  길을 마련하고// 길을 닦아라 하고 선포한 것일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주님을 모실 집을 먼저 지어라 혹은 잔치 음식을 먼저 장만하여라 하고 애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사실은 지난 대림1주일의 메시지인 "깨어있으라"는 말씀으로 우리는 이미 주님을 모실 집을 마련한 바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두번째 주간에는 주님을 깨어기다리면서 주님의 길을 준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준비해야하는 길은 시간과도 같은 맥락입니다.

즉 주님의 길은 곧 주님의 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제2독서인 베드로2서에서 그 시간에 관해서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것입니다. 그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스러지며, 땅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즉 주님의 시간은 도둑처럼 다가 온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내가 주님의 길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 시간을 다른 도둑들에게 빼앗기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주님의 시간을 빼앗아가는 온갖 도둑들로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내가 봉헌 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실은 하루에 불과 두세시간만 봉헌생활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나머지 시간을 주님을 가장한 도둑들에게 너무나도 쉽게 쉽게 내어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상생활의 세월 도둑이 무엇인지, 우리의 날 도둑이 무엇인지, 우리의 시간 도둑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상의 나그네인 우리가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길은 주님의 길이 아닌 다른 길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일입니다.

이집 저집 기웃거리거나, 또는 이길 저길 쏘다니며, 그리고 이음식 저음식 찾아다니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길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둘렀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그가 먹었던 것은 메뚜기와 들꿀이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메뚜기하면 아하 그거 자연산이구나! 하고 좋아할지 모르지만 사실 아주 거친음식입니다.

들어서 나는 가장 흔한 것을 요리하지 않고 그대로 먹은 겁니다.

그리고 들꿀을 먹었다고 하니까 뭐 들에 꿀항아리가 있어서 그 것을 퍼먹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닙니다.

벌들만 꿀을 토해내어 집을 짓고 꿀을 저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식물들도 꿀을 만듭니다.

실비아(사루비아)를 빼서 그 끝을 쪽쪽 빨면 꿀이 나옵니다.

그리고 들판에 잔디처럼 삐쭉삐쭉하게 올라온 풀을 뽑아서 하얀 줄기부분을 씹으면 단물이 나옵니다.

벌들은 그 식물이 만든 꿀을 자기 집에 옮겨다 놓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들꿀을 먹었다는 것은 들판에 핀 꽃들과 풀들이 머금고있던 그 꿀을 먹고 살았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왜 세례자 요한은 그토록 거칠고 달지도 않은 들꿀을 먹으며 광야에서 지내고 있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한 뒤 곧장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행실을 고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배운 행실은 종노릇이었습니다.

그 행실을 가지고는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실을 고치기까지, 버리기까지 무려 40년이란 시간을 광야에서 보내야했습니다.

그만큼 몸에 밴 습관을 바로잡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에게서 태어난 이들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지만 그러한 요한조차도 주님의 시간을 도둑맞지 않기 위해서 길을 닦고 준비를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평생에 걸쳐서 주님의 길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마땅히 평생에 걸쳐서 주님의 길을 닦아야할 것입니다. 

 

대림2주간을 보내면서 내가 닦아야 할 길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길인지 또한 만약에 내가 그 길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면 곧장 주님의 길로 다시 돌아와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주님의 시간으로 채워질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