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제34주간 목요일 루카21,20-28 아름다움기도(스승)
어제 바오로가족 창립 백주년 감사미사를 명동성당에서 봉헌하면서 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또는 누가 저를 그토록 감동하게 했던가? 하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화답송에서 출발되었습니다.
"주님은 영원히 성실하시나이다"(후렴)
성가대에서 울려퍼지는 화답송 후렵을 따라부르며 성당 천정을 올려다보는데 온통 십자가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오늘 복음의 끝부분에 해당하는 말씀인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잠겨있었습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 그래서 머리를 들었더니 -> 성당 천정에는 여기저기 온통 십자가로 꽉 차있음
그래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화답송 후렴을 따라 부르고 있는데 마음이 벅차올라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젖먹이 어린이들 그 입에서 마저 어였한 찬송을 마련하셨나이다"(시편8편성무일도2주간토요일아침기도) 는 구절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보니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는 말씀의 의미가 머릿속을 맴돌다가 마음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하느님 내 주시여/ 온땅에 당신이름 어이이리 묘하신고/ 하늘위 높다랗게 엄위를 떨치셨나이다/ 원수들 무색케 하시고자/ 불신자 복수자들 꺽으시고자/ 어린이 젖먹이들 그 입에서마저 어엿한 찬송을 마련하셨나이다/ 우러러 당신 손가락이 만드신 저 하늘하며/ 굳건히 이룩하신 달과 별들을 보나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 .
그래서 내 머릿속을 맴돌던 그 말씀이 오늘 모든 바오로가족이 동시에 속량되도록 이끄는 말씀이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그 말씀은 일좀 그만하고 또는 공부좀 그만하고 좀 쉬어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사도직을 하거나 머리를 숙여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 힘들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몸좀 풀고 스트레칭이라도 하며 좀 쉬어가면서 하늘을 보며 하늘에 하느님도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의미에만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께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는 말씀이 특별히 전례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우리의 속량은 조금 가까워지고 앞당겨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신앙선조들에서부터 자기 자신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기 위해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지만 아직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전례 안으로 들어오게되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것이 단순히 쉼의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께 올리는 찬미와 찬양의 시간이 됩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 다닐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가 못됩니다.
인간은 한낱 피조물 당신은 한움큼의 흙으로 인간을 만드셨나이다.
우리는 한줌의 흙으로 만드셨기에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비참한 존재가 나 자신임을 인정할 수밖에 처지에 있습니다.
창립자께서 그토록 통찰하신 "송구스러운 역사" 그리고 성공의 비결에 "아무것도 아닌 무능함"
결정적으로는 DF를 시작하시면서 당신을 향하여 스스로 물었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최종적인 해답인 "나는 무(無)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에 비추어 볼때에
오늘 복음에서 전해주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모습은 전례안에서 우리의 속량은 계속되고 지속되는 모습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속량이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도록 우리의 기도를 아름답게 봉헌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