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제33주간 목요일 루카19,41-44 평화의 도성(성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다시 말하자면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려 한탄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 도성이 평화의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평화의 길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도성을 보시며 그토록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신 예루살렘은 어떤 장소이며 무엇을 하는 곳인지 성경을 토대로 잠시 살펴보는 것도 오늘 복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의 기원에 관하여 성경본문에 나타나는 순서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살렘/모리야/여부스/다윗성/솔로몬성전/
살렘 - 멜키체덱은 살렘왕이며 아브람은 멜키체덱에게 전리품의 10분의 1을 바침(창세14,18)
모리야 -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바친 모리야(창세22,2)
여부스 - 예루살렘에 사는 여부스족은 유다의 자손들이 쫓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여부스족은 오늘날까지 유다의 자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살고있다(여호15,63)
벤야민의 자손들도 예루살렘에 사는 여부스족을 쫓아내지 않았다. 그래서 여부스족이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서 벤야민의 자손들과 함께 살고 있다(판관1,21)
다윗성 - 그러한 여부스족을 다윗왕이 쫓아냄(2사무5,8)
다윗은 여부스족의 성읍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혼샘과 연결된 지하수로를 이용했음
다윗은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고
솔로몬은 계약의 궤를 모실 성전을 지었음
솔로몬성전 - 솔로몬은 예루살렘 모리야 산에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곳은 주님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으로 본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는데 다윗이 집터로 잡아놓은 곳이었음(2역대3,1)
이렇게 솔로몬에 의해 봉헌된 예루살렘의 상징인 성전은 모두 세차례에 걸쳐 짓고 세차례에 걸쳐 파괴되는데 마지막으로 파괴된 이후 오늘날까지 다시짓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요한복음(2,20)에서 유다인들은 "이 성전을 마흔 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요?" 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역사적으로 본다면 세번째로 세워질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로데가 재건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기원전 20년에 시작된 공사는 기원 후 64년까지도 끝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로마는 유다항쟁이 끝난 70년에 성전을 모조리 파괴했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성경에서 전해주고있는 예루살렘을 토대로 예수님께서 오늘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시며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예루살렘 도성은 성전이 있고 성벽이 있습니다.
성전은 이미 지어졌지만 성벽공사는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돌아가시고도 30년이 지나도록 공사는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은 이미 지어졌는데 성벽공사는 계속해서 하고 있는 장면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한탄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성전을 짓고도 성벽을 겹겹이 쌓아 올리고 있었던 도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 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감추어진 평화'에 관하여 두번째 성전을 짓던 당시의 모습도 에즈라/느헤미아서를 참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두번째 성전은 바빌론 유배가 끝나고 돌아와서
키루스 칙령(고레스칙령)을 토대로 지었는데 에즈라 6장 4절에 보면 성전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에 관한 대목이 나옵니다.
"희생제물을 바치던 그곳에 기초를 높이 세우고 집을 다시 짓되 . . . 다듬은 돌은 세겹으로 나무는 한겹으로 쌓아라"(에즈6,4)
이어서 느헤미야서를 보면 성전을 봉헌한 뒤 계속해서 성벽 공사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루살렘 도성 외벽을 쌓아 올렸는데 성벽에 딸린 문들의 이름이 14개가 나옵니다.
계곡문/ 거름문/ 샘문/ 골짜기문/ 양문/ 물고기문/ 옛문/ 대사제 엘야십의 집문/ 물문/ 말문/ 동문/ 점호문/ 에프라임문/ 경비대문
이렇게 성벽을 쌓고 문을 달았던 이유는 안식일에 도성 안으로 짐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느헤13,19)였다고 합니다.
이와 더불어 오늘 제1독서 요한묵시록에서 일곱번 봉인된 두루마리에 관하여 전해주고 있습니다.
일곱번 봉인 되었기 때문에 세상 어느누구도 이 두루마리를 펴거나 들여다 보기에 합당한 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하신 것은 평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감추어진 평화는 평화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등불을 켜서 침상밑에 놓거나 함지박으로 덮어 놓는다면 등불의 의미는 사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하루 예수님 안에서 주님의 평화를 감추어두지 말고 평화를 찾고 평화를 전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