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제29주일 전교주일 마태28,16-20 사랑의 묵주기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시어 두 가지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첫째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두가지 사명을 통해서 칠성사의 첫째와 둘째에 해당하는 세례성사와 견진성사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전교는 시작되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는 견진성사를 통해서 전교는 완성되는 날까지 지속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생활의 기본에 해당하는 이 성사들을 통해서 세상끝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성사는 은총에 가깝고 견진성사는 사랑에 가까운 성사입니다.
특히 견진성사가 사랑에 가까운 것은 먼저 받은 은총을 간직하고 지켜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명령하셨던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간직하고 지켜내야할 명령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많은 명령들을 내리셨지만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간곡히 내리신 명령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이 명령은 무엇일까요???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한 번 맺어진 사랑을 간직하고 끝까지 지켜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마르6,8)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15,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7)
그런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랑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그리 오래지켜내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그리 오래간직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복음을 통틀어 하느님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는 꼽는다면 포도밭 소작인이야기(루카20,9-19; 마태21,33-46; 마르12,1-12)가 될 것입니다.
이번 주일(연중제27주일) 복음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해서 포도밭 소작인 비유가 하느님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되는지를 잠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는
포도밭 주인(소작인)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여기서 만약 제가 포도밭 주인이라면 어떻게 처신했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셨을 것 같으세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포도밭 주인이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세차례에 걸쳐 보냈지만
그들은 종들을 하나는 붙잡아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내가 만약 포도밭 주인이라면 마지막 남은 아들, 사랑하는 아들을 그 소작인들에게 보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윤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종교적으로는 가능한 일입니다.
며칠 전에 당고개성지(신계동)를 다녀왔습니다.
제 출신본당 선배신부님과 그 어머니께서 서울에 잠시 올라오셨다고해서 잠깐 찾아뵌 김에 가까운 성지를 찾아 순례를 했습니다.
이번에 복자품에 오르신 이성례 마리아의 생애를 다룬 성화들이 따로 전시되어있었습니다.
~~~
예수님께서 포도밭 소작인(주인)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아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아드님이신 예수님 조차 아끼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마리오 수사님의 그 거친 사도직이 생각납니다.)
즉 이 말은 '나는 나 자신을 아끼지 않는다. 고로 나는 타인도 아끼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맞는 말 같으면서도 뭔가 좀 미심적은, 뒤끝이 있는, 속시원하지 않는 면이 있는 말인것 같습니다.
윤리적으로는 분명 지탄을 면치 못할 처신이 될 것입니다.
누구는 부모 잘 만나가지고 자기 십자가를 부모님께 맞겨놓고 평생을 편히 사는데,
누구는 부모를 더 잘 만났는지는 몰라도 부모님 십자가까지 짊어지고 가기 싫은 골고타로 파견되어야 하기때문입니다.
빵도 지팡이도 없이 파견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더불어 우리는 일상안에서는 어떻게 부모가 자기 자식을 죽음으로 내 몰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안에서는 이 일들이 가능합니다.
윤리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종교적으로는 자신을 아끼지 않으면 자녀도 아끼지 않음이 가능합니다.
사실은 자신을 아끼지 않는다와 타인을 아끼지 않는다 사이에 빠진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자신을 아끼지 않으신다. 그래서 당신 아드님이신 예수님 조차 아끼지 않으셨다.
아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은 아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아드님을 아끼지 않으셨다.
즉 아니다 사실은 당신의 자녀를 아끼신다 가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자녀를 아끼심에도 불구하고 아끼지 않으셨다 입니다.
그렇다면 왜그랬을까요??
왜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랑을 보여주신 걸까요??
이웃의 벽을 허물기위해서였습니다.
이방인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였습니다.
자녀와 부모간의 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이에 가장 높고 뚜꺼운 벽을 세워버립니다.
그것은 울타리를 부수시고 길가는 사람마다 따먹도록 내어 놓으시는 초 윤리적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이 아니고서는 우리를 갈라놓은 벽을 허물지 못하고 우리를 둘러친 울타리를 결코 겉어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마지막 권에 '그 누가 짠 것들을 한 울타리에다 모았나이까'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바다란 물들이 한 군데로 모인 것을 말합니다.
물들이 흐르고 흘러서 한데 모이면 그곳은 바다가 됩니다.
그런데 모이기 전에는 순수하나 모이고 나면 모두들 짜다고 말합니다.
여러가지 맛이 드러나지 못한 채 다만 짜다고 표현합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좋았던 기억은 잊어버리고 고통스러웠던 때를 되새김질하기 때문에 인생은 짜다라고 밖에 말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다 지으시기까지 일곱번을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감탄하셨을 만큼 세상은 다 좋은 것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낱낱이 보시고 참 좋으셨던 것 같이 모두를 한데 모아 전체를 놓고 보아도 참 좋았으니 하느님 안에서 고통이란 순수한 제각각의 맛에 불과할 뿐 모두가 바닷물을 그저 짜다라고만 말하듯이 이 모두가 좋은 것 선한 것 자체로부터 오는 사랑으로 표현됨이 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바오로는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전교하는 이들을 위하여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10,15; 이사52,7)
여러분들은 바깥에 나가면 주로 무슨 기도를 드리십니까? 묵주의 기도
그러면 집안에서는 주로 무슨 기도를 드리십니까? 묵주의 기도
그렇다면 혹시 성당에 가서 미사전까지 무슨 기도를 드리십니까? 묵주의 기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기도안에 머물러 있는가? 입니다.
우리는 이번달을 묵주기도 성월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혹시 기도문중에서 가장 완전한 기도는 무슨 기도인지 모르시는 분이 있을까요?
"주님의 기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는 말 그대로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는 무슨 기도일까요???
"성모송" 그렇습니다. 성모송입니다.
성모송은 에페소 공의회(테오도코스 Theodokos : 천주의 어머니) 와 관련됩니다. 니케아(325년) -> 제1차 콘스탄티노플(381년) -> 에페소(431년)
성모송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꽃으로 엮어 천주의 성모님께 영광을 드리려는 순수한 우리의 신심에서 우러나온 기도입니다.
누가 가르쳐 준 기도가 아니라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하느님 사랑을 담은 기도가 성모송입니다.
그렇다면 묵주의 기도는 무슨 기도가 됩니까?
최고의 기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종합하는 최상의 기도가 바로 묵주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소출은 사랑이 아니고서는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사랑하는 존재는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신을 아끼지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도 그 사랑으로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서로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인 묵주의 기도를 바치며 이웃에게 하늘나라의 신비를 살고 전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