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제27주간 토요일 루카11,27-28 부활신앙은 바로 지금(딸)
이렇게 두 절로 된 복음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저번에 세 절로 된 복음이 나왔을 때에 저는 그날 복음이 가장 짧은 줄 알았었는데. . . .
그렇다면 혹시 한 절로 된 복음도 있을까요???? 없으면 좋겠습니다. . . .
교회가 생긴 이후로 서방교회의 신학은 십자가와 부활이 중심적인 역할을 해 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자들의 생활 속에서까지 십자가와 부할이 중심적인 역할은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신학적으로는 아무리 부활신앙이 최고라 할지라도
일상생활에서 만큼은 상황이 달랐다고 합니다.
신자들의 일상적인 신심생활에서 만큼은 성탄절이 가장 사랑받는 축제였으며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동의하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신앙의 핵심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에 어떤 여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해려 행복하다"
먼저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젖을 먹인 가슴은 교회 전례력 안에서 본다면 대림시기와 성탄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전례력 안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전례시계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어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를
꼭 사순시기나 부활시기 혹은 연중시기에 해당하는 말씀으로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이미 지난 일이었던 젖먹였던 가슴이나 모태의 신비에 머물러 있기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킬" 때에 받게 되는 은총에 머물러 있음이 훨신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 왔을 때에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바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 바로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루카8,21)
그리고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실 때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19-20)
또한 이와 관련하여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바오로는 갈라티아서를 통해서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3,27-28)
대림과 성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제 오늘날 우리에게는 부활이 전제된 성탄이 아니고서는 어떤 성탄도 이야기 할 수가 없습니다.
부활은 현실이고 나머지는 과거이거나 미래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살펴본다면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선언하다,선포하다)는 더이상 장소 개념이 아닙니다.
이제는 더이상 우리의 행복은 예수님이 머물렀던 곳, 가르쳤던 장소를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분과 함께 머물렀던 때가 언제였던가를 기억해 내고 그 시간을 찾는 이들이 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결코 장소나 공간의 소유로 주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젖을 먹인 가슴"이 아니라 배었던 시간과 먹여 길렀던 시절,
그리고 그때 다짐했던 약속들, 또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치러야했던 희생들 기억들이 오히려 더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케리그마를 살고 전할 수 있는 시간안에 머물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