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제25주간 화요일 피에트릴치나성비오 루카8,19-21 신앙의 경계(딸)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 라는 말을 합니다.
즉 이성은 신앙을 위하여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생각이 바뀌면 마음이 달라지고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우리 창립자 복자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님도 같은 맥락에서 가장 먼저 지성의 성화를 강조하신 것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활동이 성화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 방송인 손석희씨가 와서 메스컴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그때 손석희 마르첼리노 형제님은 이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정치인은 교도소 담장을 걷는 사람들이다.
방송인들 또한 공영성과 상업성 사이를 걷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모습은 어떠하신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족인 어머니와 형제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무리는 언제나 예수님을 기준으로 나누어 졌던 모양입니다.
먼저는 교회와는 상관없이 완전히 딴나라에 사는 사람입니다.
개인주의자들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주위에는 홀로 거룩하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두번째는 교회의 경계선을 밟고는 있지만 교회밖에 서서 교회 안을 들여다 보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 곁에 둘러 앉아서 밖을 향해, 또는 세상을 향해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예수님을 둘러싼 경계선에 머물러 계십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군중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발짝만 안쪽으로 옮겨놓아도 그 경계는 무너지고 예수님 곁으로 갈 수 있는데, 어찌하여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딱!!! 그 경계에 머물고 계셨을까?하고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성모님의 위치를 통해서 가장 완전한 공동체,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둘러싼 가장 완전한 형태의 그리스도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완전한 형태의 그리스도교라는 것은 삼위이신 하느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은 자기 정신의 신앙과 자기의 복된 태 안에서 육체와 영혼을 가지고,
즉 자기 존재의 모든 힘으로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을 받아들이셨 듯이
오늘도 마찬가지로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다운 모범적인 존재로서 세상과 교회의 경계에 머물러 계시며 교회를 보호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날 동정 성모 마리아는 과학문명 속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중대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내것과 네것을 명확히 구분하여 잃고 얻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그동안 예수님을 교회의 울타리로 밀어낸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을 교회의 파수꾼으로 내세운 것입니다.
하지만 아주 예리한 칼로 세상과 교회를 갈라놓는 일은 심판때의 일이지 지금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구원계획이 완성 되실 때까지는 당신이 아닌 당신의 어머니께서 거기에 머물러 계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요지가 아닐까? 합니다.
성모님은 한 없이 받아들이시기도 하고 또한 한없이 내어 주시기도 하시는 분으로서 교회의 울타리에 머물러 계심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잃어버리고 손해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세속의 분깃점을 허물어버리시고 까다롭고 복잡한 교회의 문턱을 낮추시기를 마다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은 철부지 아이와 같은 모습을 보일때가 있습니다.
세속의 눈으로 자신이 마치 홀로 현명하다고 자부할 수록 그런 철부지들을 비웃으며 미쳤다고 여기고 무시하기가 쉽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신앙인들은 집안 식구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데 시간을 허비한다고 눈살을 찌푸릴 것입니다.
그런데 올바로 보면 그런 핀잔 뒤에는 바리사이의 누룩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공익성보다 상업성에 더 목말라 하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부모라면 자식이 당신 자신만을 수발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세상을 향해서 이웃을 위해서 발벗고 나가 도와 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공익성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자기 부모 형제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살아가는데에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를 살아가는 사람이 곧 신앙인이자,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곁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들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그저 지성인의 경계선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예수님 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을 온전히 봉헌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