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가해 연중제24주간 금요일 루카8,1-3 필요한 시중(딸)

jasunthoma 2014. 9. 19. 03:2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특히 그들에게는 이미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 후로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제자들 뿐만이 아니라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가 낫게 된 몇몇 유명한 여자도 그들과 함께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다른 많은 여인들도 함께 다니게 된 모양입니다.

그런데 좀 눈여겨 볼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는 대목입니다.

 

시중을 들었는데 누구에게 시중을 들었는지에 머물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 본은에서는 그들은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행입니다.

루카복음은 다른 복음들과는 달리 예수님께 시중드는 모습을 애써 외면하는 것만 같습니다.

처음 광야에서 유혹을 마치셨을 때에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서는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고 했지만

루카복음은 예수님께 시중을 드는 내용이 없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방문하셨을 때에도

중요한 것은 시중드는 일이 아니라고 하셨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향할 때에도

당신을 위하여 울지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문 받으시고 수난하실때에도 천사들의 도움도 청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께 시중드는 장면이, 도움을 받는 장면이 빠지게 되었을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더불어 어찌하여 인간의 도움도 천사들의 도움도 받지 않으시고 홀로 수난하시고 홀로 아파하셨을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오늘 복음 서두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기쁜 소식을 전하실 때 예수님의 얼굴이 어떤 모습이셨을지? 를 떠올려보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즉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다른 모든 피조물들의 도움이 필요없는 분이시라는 것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에 비해서 성령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 나라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인 철부지 아이들을 언급하는 부분(10,21)에서는 아예 "성령안에서 즐거워하시며 말씀하셨다"하고 운을 떼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언제나 성령과 함께 하셨습니다.

밖에서도 안에서도, 성전에서도 가정에서도, 기도하실때에도 일하실때에도, 병자들을 만나실 때에도 제자들을 만나실 때에도 언제나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늘 성령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궁핍함 속에서도 풍요로울 수 있었고 고난 속에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께 시중을 들지 않고 그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던 많은 여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이 왜 예수님께 시중들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께 시중을 드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 일행들에게 시중을 드는 것이 쉽겠습니까?

먹보요 술꾼이라는 악평이 예수님께 어울릴까요? 그 일행들인 제자들에게 어울릴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들은 자기 재산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수님이 아닌 그 일행들에게 시중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겠습니까?

하지만 많은 여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바로 성모님과 같은 마음, 어머니와 같은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느님 나라의 아버지를 닮아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을 돌보는 관점으로 살아가는 그 여인들의 안목을 지니셨습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분은 성부도 아니고 성자도 아니며 성령도 아닙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시중이 필요한 이들을 살펴보고 그들에게 우리의 수고로움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찌하여 예수님도 아닌 예수님의 일행을 위하여 그토록 헌신적으로  도와줄 수 있었을까?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없지만 그를 따르던 일행들은 도움이 필요했다.

예수님은 수난 하시면서 천사들의 도움도 청하지 않았다.

당신 발을 씻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신은 발씻김을 받으셨고 발을 씻는 일을 자청하여 했던 유일한 남자였다.

 

예수는 하늘나라의 아버지를 닮아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을 돌보는 관점으로 살아가는 여인들이 지닌 안목을 지니셨다.

 

가만히 있을 수 있을 때가 천상적인 삶인가?

즉 십자가 아래서 편안하고 자유로움을 느낀다면

예수님 아래서 그 누가 십자가가 되더라도 평화로울 수 있다면

이 지상에서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을 때라도 누군 가를 향한 그리움을 간직한다면 

 

그렇다면 이 여인들은 가정이 있는 여인들이었을까?

자녀들을 다 출가 시키고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살아가는 여인들이었을까?

아니면 어머니인 이 여인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의 일행들을 돕는 것을 보고 그 자녀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에 들어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까?

믿음은 인내(신뢰)를 의미한다. - 성경에 쓰인 그리스어 말고 일반적인 그리스어로

 

수도자들도 성직자들도 모두 영적인 자녀를 낳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몸소 보여주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는 일행이 되게끔 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