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제24주간 목요일 루카7,36-50 포카페이스(딸// 240919 성바)
어제 장충동분도출판사를 다녀왔습니다.
팩스가 안들어갔는지 와야할 책이 오지 않았습니다.
오후에 꼭 보내야 할 책이라 군소리 없이 갔다왔습니다.
경동교회 앞을 무뚝뚝하게 걷고 있는데 젊은 연인이 손을 잡고 지나가는 겁니다.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는지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폈습니다.
그들 곁을 지나가면서 빌딩 유리창에 비춰진 내 얼굴을 보니 세상에 내 얼굴이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분명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걷고 있었는데 어찌 하여 미소짓는 얼굴로 바뀐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얼굴에만 기쁨이 전해진 것이 아니라 기쁜 내 얼굴을 보자 마음에 기쁨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저 뿐만 아니라 우리 곁에는 웃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지내는 사람있습니다.
우리 곁에는 포카페이스를 가진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포카페이스를 가진 사람이 웃을 일이 생겼을 때는 어떻게 웃어야 할까요?
웃음 소리는 나는데 표정의 변화가 없으니 어떻게 해야할까요?
엄지로 입고리를 올리고 검지로 눈고리를 내리는 번거로움이 따를 것만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에게는 향유를 부은 것이 사랑으로 보이는데 또 어떤 이에게는 죄로 보이기도 하나봅니다.
죄의 눈으로 보면 죄로보이고
사랑의 눈으로보면 사랑으로 보이나 봅니다.
바리사이들의 논리는 죄인이 하는 행동은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나쁜 행실로 즉 죄인의 행동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즉 나자렛에서는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라고 하거나
혹은 갈릴레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올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예수님은 그 여인의 행실을 사랑으로보셨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아버지로부터 전해받은 사랑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그처럼 사랑이신 분께서 바리사이와 그 여인 사이에 계셨기 때문에 그 여인의 행실을 사랑으로 볼 수 있지 않았을까???합니다.
이는 빛과 그림자는 정비례하지만 그 사이에 사랑이 들어가면 반비례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빛이 밝을 수록 어두움은 짙어지지만 그 어두움이 짙을 수록 사랑의 반사는 더욱 커지고 결국에는 사랑만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큰 사랑을 드러내고 적게 용서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며칠 전에 사촌 여동생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어두움이 짙은 집안의 불행을 다 참아 받았습니다.
그는 어려운 가정에 화목한 기운을 불어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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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많아진 그 곳에 은총도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5,20)라고 말한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1독서에서) 자기는 죄를 멀리하지 않고 그곳에 아버지의 사랑을 짊어 지고 갔기에 큰 은총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어두움이 어둡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빛과 어둠 사이에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대상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무표정한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필수 있도록 내 얼굴이 사랑의 웃음을 머금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