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가해 연중제19주간 수요일 마태18,15-20 화해의 권한(성바)

jasunthoma 2014. 8. 13. 05:1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화해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즉 화해는 하되 형제를 단죄하지는 말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이 됩니다.

그러니까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그형제를 죄인으로 묶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화해를 통해서 형제 하나를 얻을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해는 공동체 생활을 하는 이들의 기본 소양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토대로 화해에 관해서 다섯가지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단둘이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떼로 몰려가서 다짜고짜 그사람의 잘못을 추궁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먼저 단둘이 만나서 화해의 기회를 주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타일러도 단 둘이 만나서 타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타일러라고 합니다.

즉 타일렀는데 또 한 번 더 타이른 다는 것은 화해하는데에는 시간이 필요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런 다음에 증인으로 한께 타일렀던 그 두 세 증인의 말로 확정하 짓게 됩니다.

확정짓는 다는 것이 죄인으로 취급받는다는 의미라기보다 형제가 화해를 거부하고있음을 서로 확인하는 차원입니다.

넷째는 그래도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립니다.

이제는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적인 차원에서 교회의 책임자나 지도자에게 그 형제의 일을 알려 공론화 시킵니다.

이는 단체로 한 형제를 몰아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눈으로 형제의 잘못을 공정하게 바라보는 차원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끝까지 그 형제를 단죄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마지막까지 그가 화해를 거부한다 하더라도 그를 단죄하지 않고

다만 세리이거나 다른 민족 사람이라서 그러려니 하고 이방인 취급하는데에 머물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제가 죄를 지어도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되는 것이 전부입니다.

단죄는 형제들의 몫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모야 청해야하는 것은 화해이지 단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얼마나 한 사람을 죄인으로 단정하기가 어려운 일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슨 일이든 빨리빨리 처리하려고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심판한 빌라도는 불과 하루라는 짧은 시간동안에 완전하게 죄인으로 단죄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행동은 빠르되 판단은 느리게 해야할 때가 있고 행동은 느리되 판단은 빠르게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어떤 형제가 죄를 짓더라도 그를 판단하는 일은 느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느리게 하더라도 결코 단죄까지는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땅에서 매고 푸는 권한에 관하여 우리가 잘 못 이해할 수 있는 점들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먼저는 개인의 권한의 확장에 있습니다.

16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자

그때 이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하시며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만 하늘나라의 열쇠를 부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존에 하늘나라의 열쇠에 관해 하셨던 말씀이 베드로 개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제는 공동체 모든 이들, 즉 "너"에게 에서 "너희" 에게로 확장되고 있슴을 알수 있습니다.

 

개인의 권한이 개인에게만 부여되지 않고 공동체로 또는 모든 형제들에게로 확장된다는 것은

개인만의 권한이 무력해지고 무의미해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속단적으로 일처리를 해서는 공동체에 부여된 화해의 기회를 막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코 땅에서 매고 푸는 열쇠가 형제를 판단하여 묶어놓고 풀어주는 열쇠가 아닙니다.

매고 푸는 것은 화해와 관련된 것이지 결코 판단과 속단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죄로 말미암은 위기를 화해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형제는 나에게 도움을 주느데도 미운 형제가 있고

어떤 형제는 나에게 피해를 주는데도 고마운 형제가 있습니다.

그럼 처지를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어떤 형제 중에 나에게 계속해서 도움을 주는데도 내가 계속해서 미워하게 되면 계속해서 도움을 주는 형제는 어떻게 할까요?

계속해서 끝까지 죽을때까지 도움을 줄까요?

아마도 어느정도까지는 도움을 계속 주다가 열정이 시들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다른 형제들에게 저 형제의 부당함을 죄다 이야기 할지도 모릅니다.

다른 형제들과 함께 합세해서 그 형제의 부당함을 이야기하는데도 듣지 않으면 이제는 교회에 알릴 것이고 계속해서 그의 부당함을 퍼뜨릴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에게 충고를 받은 형제가 그렇게 고집을 피우지 않고 단 둘이 만나서 충고를 할 때에 벌써 그 형제가 다 받아들이고 잘못을 시인해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잘 못을 받아들이고 시인하고 화해를 해서 형제 하나를 얻었구나 하고 생각할 것 같은데

현실은 냉랭한 분위기만 지속된다면 어떻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