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부활제3주간 수요일 요한6,35-40 부활의 전체성(성바)
어제와 그제 이틀간에 걸쳐서 창립 100주년 바오로 가족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이번 세미나에서 창립자의 저서 두 권인 사목신학 개요와 사제적 열의에 참여하는 여성에 관하여 강의를 들었습니다.
특히 어제 사제적 열의에 참여하는 여성의 강의를 들으면서 수사님들은 어떤 내용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저는 창립자의 균형잡힌 여성관이라는 내용이 기억에 남습니다.
창립자의 균형잡힌 여성관이 뭐였습니까?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남자 수도회 하나에 여자 수도회 4개를 세우셨잖아요?
균형이 제대로 잡혔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럼 과연 뭐가 어디서 균형잡혔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복음을 위해서 전체성 안에서 복음선포 사도직에 봉헌된 여성을 더 많이 선발한 것 자체가 균형잡힌 여성관을 지녔다는 내용일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여성의 역할이 복음선포에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 세미나를 통해서 창립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리고 전하고 보존하는데 여성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재확인하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리고 전하고 보존하는데 여성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은 오늘 제 1 독서를 통해서도 볼 수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스테파노의 순교 이후 교회의 박해가 시작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진 사람들의 무리가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비롯하여 교회를 박해하던 무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고 전하고 보존하는 사람들을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초대 교회의 역사 안에서 여성의 역할과 관련해서 좀 생각해볼 점이 있습니다.
사도들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는 대목입니다.
무엇때문에 사도들 말고는 모두 예루살렘을 빠져나가 도망 갈 수밖에 없었을까요?
반대로 이 질문은 어떻게 사도들만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있을 수가 있었을까? 라는 물음과 연결됩니다.
예수2에서 클라우스베르그는 사도들의 수장인 베드로에 관하여 주석하면서 긴 편지를 썼습니다.(클라우스베르그는 교회의 절충주의에 심도있는 비판을가하고있다)
그 편지를 읽다보면 거기서 베드로를 3번이나 부인하게 하면서 베드로의 눈에서 눈물을 확인했던 분이 예수님 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이어 베드로를 추궁했던 여인들과 모든 사도들이 달아났지만 마지막 십자가 아래서까지 꼿꼿하게 서있었던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상기시켜줍니다.
만약 베드로가 세번 부인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그들을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과연 예루살렘에 사도들이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일이지만 겉으로 드러나게 활동하실 때에는 분명 모든 사람들을 참여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순교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배반자 유다보다 더 혹독한 평가를 받았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에 비추어 볼 때에 베드로의 공생활이 결코 예수님을 본받은 모범적인 생활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은 마지막날에 당신을 따르던 이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생명의 빵", 살아있는 빵이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믿어라고 권고하십니다.
베드로가 순교한 순간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의 심판은 지금의 삶도 반영된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않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의 심판은 현재의 삶을 최종적으로 밝히는 일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그가 순교하는 순간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얼마나 많이 뉘우쳤는지를 주님은 반영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지막날의 심판이란 결과만 놓고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행위에 따른 결과로 드러난 것을 나중에 마지막날에 판가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큰 시상식일 수록 시상자 발표를 먼저 해놓고 시상식은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에 따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살아 있을 때에 믿지 못하면 죽은 뒤에 믿음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믿는 이들을 다시 살리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지막 날은 육신이 죽는 그 날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당신의 아들을 다시 보내시는 그 날이 우리의 마지막 날 종말입니다.
그 때에 영원한 삶과 영원한 죽음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여기서 보고 믿는 날이 곧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부활하신 예수님안에서 모든 이를 살리시려는 예수님의 마음 안에 머물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