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성주간화요일 요한13,21ㄴ-33.36-38 잠시 그러나 곧(딸)
얼마전 주교회의 춘계총회에서 주일미사 참례 의무와 고해성사 의무에 관하여 사목적 지침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교계신문에서 고해성사에 관하여 특집을 다루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런데 이에관하여 어떤 분이 이번에 고해성사를 다룬 교계신문 내용이 몇 해전에 다른 교계신문에서 다룬바 있는 고해성사 특집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라며 변치않는 고해성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주일 미사를 빠진 죄와 그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가 정말 고해자 스스로가 주관적으로도 자각하는 중죄인가?에 관하여 생각해 볼 문제라는 것이 그 올린 글의 요지입니다.
우리는 고해성사의 부담감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고해성사에 관해서 수사님들 중에서는 강심장이 있습니다만 수녀님들 중에서는 아마 강심장이 없으실 것만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와 함께있는 것도 잠시 뿐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은 이미 확정되어 있는 곳이지만 제자들이 가는 곳은 아직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심장인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재차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하며
곧 바로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고 호언장담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불과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죄에 물들게 될 제자들을 예수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사탄은 제자들이 같은 죄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짓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기 전에 유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악마를 보시고
이제 당신 자신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을 받아들이신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이 하느님께로 돌아가시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신이 떠난 것이 더 이롭다고 일러두시기도 하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안계시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더 유익합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제자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빤히 보고 계신는데 그 앞에서 죄를 짓기보다 차라리 저 멀리 계실 때에 죄를 짓는 것이 덜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회초리 맞아 보셨나요?
회초리를 맞아도 눈을 딱 감고 맞는 것이 덜 아픕니다.
회초리를 쳐다 보면서 맞으면 회초리가 닿기도전에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몰려옵니다.
보면서 맞는것 보다 차라리 눈감고 맞는 편이 덜 아픕니다.
걸려 넘어지더라도 예수님이 잠시 거처를 마련하러 가신 사이에 넘어지는 것이 덜 챙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밤이라도 사탄의 움직임을 훤히 다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에도 두려운데 떠나시고 나면 그 두려움은 얼마나 더 짙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하여 그 밤의 두려움도 걱정도 그렇게 하도록 잠시 내버려 두십니다.
잠시후 예수님이 우리 곁을 떠나시면 곧이어 밤이 찾아 오겠지만
당신이 다시 오시리라 믿기 때문에 어두움이 아무리 짙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잠시 후에 들어닥칠 어두움도 당신이 오시면 어둡지 않기 때문에 걱정하지않습니다.
오늘하루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두려움이 더욱 짙어지지 않도록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좋겠습니다.